1987년생. 그땐 관심도 없었고, 대통령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잘 몰랐지만,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7년 겨울에 DJ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혹시나 하고 옛날 일기장을 들춰봤지만, 역시나 언급 조차 안했다. 1997년 12월 19일은 공란이다. 기록이 없다. 그로부터 나흘 뒤 남자들은 꼭 한다는 그, 수술을 받은 기록이 남아있다. IMF와 역사에 남을 대통령의 당선 따위는 그, 수술보다도 내겐 의미 없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2002년 12월 19일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노통이 당선됐다. 역시 기록은 없다. 당시에는 일기 따위는 쓰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있다. 첫 연애의 아픔을 겪고 세상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듬성듬성 고통스런 기록들을 난잡하게 적어내리면서 그 기적같은 승리라던 대선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열병 같은 사랑 앞에 ‘바보’의 대역전극 따위가 대수였을까.
2017년 5월 8일, 사상 초유 대통령 파면 이래 치러지는 보궐 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달님이 당선될 것이란 대략 89% 정도의 예상 때문이다. 달님이 당선되면 민주 정부 3기가 될거다. 그런데 내게, 그리고 아마도 내 또래 평범한 TK 친구들에게 민주 정부 1, 2기는 그런 정부였다. 그들이 당선된 날은 남자가 되기 위한 수술이나 첫 연애의 아픔 속에 그저 그런 12월 19일 중 하루였을테고, 그들의 통치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을거다.
그들의 역사적인 당선과 통치가 직접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나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의 통치를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맞벌이 하는 부모님, 그래서 한 살 터울 동생 점심밥을 마찬가지로 초등학생이던 내가 준비해 먹었던 모습, 동생과 단 둘이서 집을 지키던 모습, 저녁 늦게 돌아온 엄마의 지친 모습이라든가. 객지에서 일하며 한 달에 한, 두 번 집으로 오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들의 통치를 기억하고 있다.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어린 나의 푸념도 있다. 아마도 집안 형편을 어느 정도 알게된 중학교 시절의 푸념일거다. 그때 나는 왜 우리 엄마와 아빠는 저리 힘들게 일하는데, 집안 형편은 나아지질 않는 걸까. 생각했었다. 더 분명하겐 엄마와 아빠 은연중에 하는 ‘빚’ 이야기에서 파생된, ‘우리 엄마 아빠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이 안 없어진다는 걸까?’하는 푸념, 아니 어쩌면 첫 사회 의식화? 였다. 가계부채 1,300조 시대에 이 ‘빚’이란 게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 대부분의 서민 가정은 다 갖고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었다는 건 뭐 나중에 안 일이긴 하지만. 여하튼. 민주정부란 건 내게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린 나는- 박정희를 존경했다. 우리 엄마, 아빠의 노력을 좀 먹는 건 저 부패한 정치꾼들이라고 생각했고, 정치쇄신을 위해 ‘혁명’을 감행한 박정희를 존경했다. 날 잘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한 땐 그래서 육사 진학도 고민했었다. 박정희에 대한 존경을 거둔게 언제쯤인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조정래 선생의 한강을 읽은 시점이었지 싶다. 고등학교 1, 2학년 그 언저리? 하지만 부패한 정치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20살, 이제 막 사회를 알아갈 때쯤은 2006년이었고, 그 무렵 노통은 그냥 욕받이였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말로 모든게 정리가 됐다. 거기다가 전부 없어졌지만, 몇 안되게 남아있던 운동권 선배들은 노통에게 이를 갈았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거론하며, 경찰이 때려 죽였다고 했다. 민주정부 1, 2기가 그렇게 내겐 기억된다.
그냥, 그렇다는거다. 사람은 살아온 삶 안에서 경험과 기억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진심으로, 89%(내맘이다)의 확률로 들어설 민주정부 3기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란다. 험로가 예상된다. 난관이 많을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험로를 헤쳐서 난관을 넘어서서 성공하길 진심으로 희망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시민이 말한 것처럼 어용지식인(아이고, 유 판서만큼 지식인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이 되고 싶은 마음은 나는 없다. 내 삶에서, 민주정부는 그 정도였고, 그 이상 날 사로 잡은 적이 없다. 나는 소비자니까, 깐깐하게- 다시 상품을 고르기 시작할거다. 5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