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 60년 삶의 터전, 그곳에 철탑이 들어온다

청도 삼평리 가촌댁 할머니를 만나다

우물이 하나 있다. 깊이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어디서 구했는지 낡은 철모가 낡은 줄에 매어 두레박 역할을 했다. “한번 길어 보소.” 맑은 물이 철모에 가득 길어졌다.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있었다 카던데. 우리 시조모의 시어마시도 여기서 살았는갑던데요. 카믄 우물이 얼마나 오래됐겠능교.” 땅 깊숙한 곳에서 쉼 없이 맑은 물을 뱉어낸 세월의 깊이는 더더욱 짐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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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5일 삼평리에서 열린 성탄문화제에 참석한 가촌댁 할머니(가운데) [출처=뉴스민 자료사진]

“내 살아온 세월은 오늘 점도록 해도 이바구 다 못한다.” 여기 또 다른 짐작할 수 없는 세월이 있다. 60년을 한 곳에서 살았다. 마당 한구석에 우물이 있는 집이다. 스무살이 되던 해 청도군 풍각면 덕양에서 10리 떨어진 이곳 각북면 삼평리로 시집을 왔다. 시어머니는 송서댁이라고 불렸다. 이웃들은 그를 송서댁 며느리 또는 가촌댁(사진, 79 조봉연)이라고 불렀다.

아홉 살이 많은 남편은 장손이었다.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시동생 셋, 머리를 올리지 않은 시누이가 하나, 그리고 시조모까지 9명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대가족은 줄곧 한 곳에서 살아왔다. 언제부터 이곳에 터전을 잡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가촌댁은 그저 “우리 시조모의 시어마시도 여기서 살았는갑던데”라는 말로 세월을 짐작했다.

우물 깊은 집 첫째 며느리…가촌댁
“살아온 세월, 오늘 점도록 해도 이바구 다 못해”

시집은 그리 크지 않은 자가농이었다. 배와 감을 주로 재배했고, 고추와 콩도 함께 길렀다. 시어른과 남편은 아침도 먹지 않고 밭일을 나갔다. 시어른과 남편이 밭일을 나가면 가촌댁도 일과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물물을 길어 아침밥을 안치는 일이다. 커다란 솥에 보리쌀을 가득 담았다. 흰쌀은 귀했다. 어른들만 먹을 수 있었다. 보리쌀과 흰쌀이 섞이지 않게 안치는 기술이 필요했다.

아침밥이 준비되면 서둘러 밭으로 나가야 했다. 남편은 조금만 아침밥이 늦어도 야단이었다. “요새야 식당에서 시켜묵으면 되지만서도 그때야 그런게 어딨노. 놉을 해도 밥은 집에서 해다 믹이야지.” 집안 식구들까지 밥을 챙겨주고 나면 가촌댁도 밭일을 도왔고, 찬을 준비하고,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해가 져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은 있었다. “우리 시절에는 옷도 손으로 지어 입었다. 아들 옷도 다 지어 입히고 그랬다.” 밤이면 가족들이 입을 옷을 지어야 했다.

그렇게 60년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60년 동안 땅을 일궜다. 결혼한 시동생이 집을 떠나고, 시조모가 돌아가시고, 시어른들이 돌아가셔도 이곳에서 땅을 일궜다. 아들 셋을 키웠고, 장성한 아들 셋이 직장을 찾아 부산으로 대구로 떠나도 여전히 땅을 일궜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가. 그동안 하던게 있어놓으니까 자식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밭일을 나가게 된다.” 가촌댁은 지금도 땅을 일군다.

남편은 좋아하던 술 때문에 병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떴다. 가촌댁이 54살이던 해, 25년 전의 일이다. 이제 이곳에는 시어른과 남편의 무덤, 가촌댁 만이 남아있다. “큰아들네가 자꾸 같이 살자카는데 내가 안간다고 한다. ‘너그는 너그 맘대로 살아라. 여 친구도 많고, 시어른 무덤도 여 있고, 내는 내 맘대로 살란다’ 그런다. 명절 때면 벌초하러 많이들 온다.” 60년 세월이 일궈 놓은 것은 땅 뿐이 아니었다.

60년 세월의 터전, “친구도 많고, 시어른, 남편 무덤도 여 있고…”
60년 세월의 흔적, 닫지 않는 대문

아침에 눈을 뜨면, 가촌댁은 가장 먼저 마당으로 나와 대문을 연다. 이때부터 열린 대문은 그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닫히지 않는다. 밭일을 나가거나, 농성장에 나가서 집이 비어도 대문은 열어둔다. 지난 5일 오전 11시, 기자가 그의 집을 찾았을 때도 대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함께 집을 나설 때도 대문은 닫히지 않았다. “다 아는 사람들 사는데 문은 뭐한다고 닫아” 대수롭지 않게 그는 말했다. 오랜 세월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온 마을 사람들에 대한 깊은 신뢰가 묻어났다. 60년 세월이 만들어준 새로운 가족이다.

여느 시골 마을이 그렇듯 이곳 삼평리의 주민들도 오랫동안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왔다. 땅을 일궈 살아가는 시골 마을 특유의 생활 방식이자 생존 방식이다. 넓은 밭을 일구는 데 필요한 많은 일손은 서로가 상부상조하지 않으면 충당할 수 없다. 특히, 삼평리처럼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만 남아 땅을 지키고 있는 마을은 더욱 주민간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놉 팔이라고도 하는데, 농번기에 서로 품앗이를 하는 어머니들 간의 룰이 확고하다. 내가 반나절 놉을 팔면, 반드시 상대도 반나절 놉을 팔아줘야 한다. 이곳에서 가장 예민한 문제가 바로 농번기에 품앗이 문제였다. 이 부분에서 다툼이 생기면 중재가 힘들다”는 이보나 청도345kv송전탑반대공동대책위 상황실장의 증언은 이곳 주민들의 삶이 서로에게 얼마나 매여져 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송전탑이 들어오고 마을이 무너졌다
집 가까운 경노당 두고 농성장으로

오랜 세월 함께 땅을 지켜온 끈끈한 인연은 2년 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국전력공사(한전)는 신고리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송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청도와 경남 창녕 일대에 345kv 송전탑 41기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2006년 1월 한전은 주민설명회를 열었지만, 실제 주민설명회에 참석한 주민은 극소수였다. 대다수 주민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주민들은 2009년에야 송전탑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09년 한전이 공개한 송전탑 건설 예정지는 삼평리가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송전선로가 변경됐다. 주민들은 2011년에 송전선로가 변경돼 삼평리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다음해 4월,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사가 시작됐다. 국책사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주먹구구식 사업 진행이었다. “왜 여기까지 올라왔냐고 물으니까. 산소 피하고, 재실 피하고 하다 보니 여까지 왔다고 하더라. 내가 ‘카몬 죽은 사람은 중하고 산 사람은 죽어야 되나’ 그라니까 아무 말도 못하는기라.”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송전탑 건설에 맞섰다. 청도 각북면과 가촌댁의 친정이 있는 풍각면 등 2개면 15개 마을이 반대했다. 하지만 시나브로 하나, 둘 백기를 들었다. 한전은 주민들의 지중화 요구는 비용을 이유로 난색을 보이면서, 수억 원의 마을발전기금을 미끼로 주민들을 회유했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의 불법・편법이 이뤄졌다. 마을이장은 사문서를 위조해 주민의견서를 제출했고, 군청 공무원들은 주민설명회 공고를 하지 않았다. 마을발전기금을 받은 풍각면의 한 마을에서는 기금유용 의혹이 불거졌다.

법 없이도 잘 살아왔던 주민들에게 갑자기 법이 들이닥쳤다. 법은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에게만 엄했다. 벌금을 내라 했고, 법원으로 출두하라고 했다. 반면 사문서를 위조한 이장은 공소시효만료, 군청 공무원은 ‘업무 미숙 일뿐’이라며 모두 검찰 수사 단계에서 불기소 처분됐다. 겁을 먹은 주민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벌금을 한정없이 때리데. 그래가지고 동네 사람들이랑 많이 벌어졌다. 겁을 내가지고.” 가촌댁의 집과 가까운 경노당에는 이제 주민들이 잘 모이지 않는다. 가촌댁처럼 송전탑을 반대하는 이들은 공사장 인근에 만든 농성장에서 모인다. 농성장을 갈 수 없는 주민들만 경노당을 찾는다.

▲지난해 3월 1일 삼평리에서 열린 평화콘서트에서 가촌댁 할머니가 열창하고 있다.
▲2013년 3월 1일 삼평리에서 열린 평화콘서트에서 가촌댁 할머니가 열창하고 있다.

“철탑만 안들어오면 우리가 재미나게 살 수 있습니다”

가촌댁의 마을을 지나는 송전탑은 모두 5기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과는 불과 200m 떨어진 거리에 세워진다. 집에서만 조금 거리가 있을 뿐, 농번기 생활 터전인 농지에는 그마저도 없다. 농지 바로 위로 송전탑이 지나간다. 가촌댁의 배 밭 바로 위로도 송전탑이 세워졌다. 지난해까지 4기가 완료됐다. 이제 23호기 하나만 남겨두고 있다. 23호기의 건설을 막기 위해 주민들은 온몸으로 현장을 지켰다. 지난 2012년에서 2013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은 주민들에게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작년 겨울에는 죽을 뻔했다. 눈 많이 오고, 추워가지고. 요새는 딴 데서 와서 자주고 하니까 얼마나 고맙노. 작년에는 아무도 안 도와주재. MBC고 KBS고 아무리 전화해도 찍으러 나오나…. 할마시들 열 나은 명 있는데 용역들은 한 50명 들어와가 개 끌듯이 끌어내재. 진짜 죽을 뻔했다”

사실, 청도의 송전탑은 청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1년 기준 시도별 전력자급률을 살펴보면 경북의 자급률은 162.4%다.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송전탑이 없어도 경북은 전기가 남아돈다는 말이다. 문제는 자급률이 10%도 되지 않는 서울(3%), 대구(1.3%) 등 대도시다. 청도뿐 아니라 밀양의 송전탑은 서울과 대구 등 대도시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필요악이다. 도움을 호소하는 가촌댁의 절규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지난해 가촌댁은 비뚤비뚤한 글씨체로 “존경하는 판사님께”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가촌댁은 “나이 스물에 시집와서 지금 칠십 여덟 노인입니다. 내 반평생 손톱이 빠지도록 일궈온 땅에 철탑이 들어온답니다. 땅을 잃게 생겼니다. 이 철탑만 안들어오면 우리가 재미나게 살 수 있습니다. 제발 철탑만 안 들어오게 해주십시오”하고 호소했다. 60년을 ‘재미나게’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호소다. 그의 호소를 외면할 자격이 내겐 없다.

청도=이상원 객원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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