뗄 수 없는 아버지의 꼬리표… 이정건씨를 만나다
바야흐로 ‘국가정치원’의 시대다. 정치 일선에서 정당과 청와대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국정원이 하는 말과, 국정원에서 들은 말이 정치의 모든 것인 시절이다. 따지고 보면 해방 이후 우리 역사에서 국정원이 정치를 좌우하지 않았던 시절이 별로 없었다. 1961년, 중앙정보부(중정)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국정원은 수십 년 동안 간판만 바꿔가며 정치판을 주물렀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수많은 공안사건은 억울한 생명을 앗아갔다. 1968년에도 ‘국가정치원’의 검은 그림자는 9살 어린 소년의 아버지를 빼앗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68년 7월 어느 날, 9살 소년은 집 마당에서 아버지와 멱을 감고, 동네 문방구에서 구입한 조잡한 장난감으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 보는 아저씨 둘이 대문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정중하게 소년의 아버지를 찾았고, 함께 나갈 것을 요구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저 “갔다 오께” 한마디만 남기고 문을 나섰다. 그 길로 20년. 소년이 청년이 될 시간 동안 아버지는 차가운 철장 너머에서만 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보다 한 해 앞서,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인은 두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돼 영구 집권의 야욕을 키우기 시작한다. 68년 1월에는 대통령이 된 군인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북한의 특수부대원 31명이 수도권에 진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구집권의 야욕과 북한의 위협이라는 인자는 너무나 쉽게 화학작용을 일으켜 공안사건으로 결합했다.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그렇게 역사에 등장했다.
“갔다 오께” 한마디 남기고 대문 나선 아버지…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과 20년의 이별
45년 전 9살이었던 이정건(사진)씨는 이제 쉰을 넘긴 중년이 되었고, 그의 아버지 이일재 선생은 지난해 3월 세상을 떠났다. 정건씨는 “어딜 가든 내 이마에는 ‘이일재’ 세 글자가 적혀있다. 창피해서 그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해도, 꼬리표 같이 따라 붙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건씨는 그 꼬리표가 싫지는 않다. 이일재 선생 생전에 진행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건씨는 “아버지의 삶을 100% 공감하지는 않지만 삶의 가치는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건 어쩌면 20년의 옥살이 이후에도 지치지 않고 한 가지 삶의 목표를 위해 살다간 아버지의 거짓되지 않은 삶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지켜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건씨는 “아버지는 생전에 ‘나는 20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20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했어요. 만회해야 한다는 거였지요”라며 열정적으로 살다간 아버지를 회상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정건씨는 아버지의 활동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다. 다섯 살 무렵부터 그는 부산으로, 서울로, 의정부로 길을 나서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당시 이일재 선생은 전국 각지의 노동운동가들을 만나, 노동운동 세력을 규합해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들 구상을 하고 있었다. 정건씨는 아버지가 동지와 술잔을 기울이며 노동자를 위한 세상을 논의할 때, 술상에 놓인 안주를 집어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귀동냥했다. 하지만 이일재 선생의 이러한 활동은 결국 중정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다.
9살 정건씨와 이일재 선생을 20년 동안 갈라놓은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68년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을 수사하던 중정이 이일재 선생을 비롯해 13명을 연행, 조사한 후 통혁당 사건과 별개로 조작한 공안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이일재 선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권재혁 선생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이 중정에 의해 조작됐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미 이일재 선생은 20년의 세월과 건강을 잃은 후였고, 권재혁, 이일재 선생의 삼촌 이강복(옥사) 등이 아까운 목숨을 잃은 후였다.
정건씨는 “금방 온다고 했는데 기다려도 오지 않더라. 1년 정도 지나서야 왜 잡혀갔는지를 알게 됐다. 간첩이라고 하더라. 어릴 때라도 보고 들은 게 있어서 아버지가 뭔가 작당을 하고 있다는 낌새는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간첩이라니…. 간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렸지만 아버지가 노동운동이란 걸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일재 선생은 88년, 88올림픽 기념 광복절특사로 석방된다.
“아버지 뭐하시냐”, “…….”
슬리퍼가 후려쳐도 마땅한 대답 없어
나쁜 소문은 삽시간에 정건씨가 살고 있던 동네에 퍼져 나갔다. ‘간첩’의 아들에게 동네 사람들은 관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잡혀간 후 몇 달 뒤에 찾아온 중정 직원들에게 힘들어서 살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자 중정 직원이 옆집 사람에게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문이 이미 다 퍼져서 소용이 없었다. 직접 괴롭히진 않지, 그때부턴 왕따를 시키기 시작했다”
13살 무렵, 그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 삼촌 집으로 갔다. 그때부터 중정 직원들은 수시로 삼촌 집으로 찾아왔다. “삼촌이 세무공무원이었는데 찾아오는 것 자체가 공갈이고, 협박이었다. 올 때마다 삼촌은 돈을 뜯겼다” 덕분에 정건씨는 숙모의 눈칫밥을 먹으며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19살이 되던 해까지 숙모의 구박을 견딘 정건씨는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미련 없이 대구로 내려왔다. 이후에도 경찰을 비롯한 공안기관은 이일재 선생이 석방되기 전까지 수시로 정건씨를 찾아와 동향을 확인하곤 했다.
성장기에 간첩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생이별한 정건씨는 “큰 방황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어린 가슴에 상처로 남을 사건을 여럿 겪었다. 학창시절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정건씨는 영화 <친구>에서 유명했던 한 장면과 똑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노라고 웃으며 말했다. 180cm 가량의 정건씨는 학창시절부터 큰 키와 덩치에 비해 작은 책걸상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다리만 접으면 허벅지가 책상 밑 부분에 닿아서 덜커덩하는 소리가 났는데, 하루는 영어선생님이 그 소리를 듣고 정건씨와 그의 짝을 불러냈다.
“너희 아버지 뭐하시냐고 묻더라고. 막막했다. 내 짝은 아버지가 종로에서 시계방을 했어요. 나는 그런데 막막했다. 감방에 있는데 ‘감방에 있습니다’하기도 뭐하고, 죽었다고 할 수도 없고, 우째야 되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영어선생은 슬리퍼를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그냥 노신다”고 답했다. 답을 들은 영어선생은 한 번더 슬리퍼를 휘두른 후 그를 들여보냈다.
다시 대구로…. 88년, 아버지의 석방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는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하지 않고, 대구로 내려왔다. “(대학을 가지 않은)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할까…. (연좌제 때문에)그냥 공무원은 하기 힘들겠구나, 공무원으로 출세하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었다” 대구로 내려온 그는 인쇄소 등에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권유로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헤겔, 존 스튜어트 밀 등 철학자들의 책을 읽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가 대학에 들어갈 필요성을 특별히 느끼지 못한 건,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혼자서 철학서를 보거나 신문을 읽으며 세상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읽으면 이해되는 것도 있고,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되면 되는대로 읽었는데, 그때 읽었던 철학서가 지금에 와서야 이해가 되곤 한다. 철학이나 인문학은 인생 짬밥도 좀 있어야 이해가 되는거예요”(웃음)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덕분에 그는 아버지와 같은 ‘직업적 운동’의 길과는 가까워질 계기가 없었다. 당시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진보적 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은 정권의 강력한 탄압을 받고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노동운동 자체에 정건씨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
88년 8월 15일 아버지가 석방된 이후부터 정건씨는 아버지의 지근거리에서 아버지가 20년의 공백을 따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아버지가 20년의 공백을 쫓아가는데 필요한 것 중에는 주민등록증도 있었다. 주민등록증은 이일재 선생이 수감되던 해 11월부터 발급되기 시작했다. 정건씨는 아버지의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해 지금의 대구중앙파출소 부근의 사진관에서 아버지의 증명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증명사진 필름이 필요해 찾아간 사진관에서 필름을 경찰이 찾아갔다는 웃지 못할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한다.
“저거가 무슨 유․무죄 판결을 하노”
석방 당시 예순여섯이었던 아버지는 이후에도 병상에 오르기 전까지 대구노동정책연구소, 민주노총 지도위원, 사회주의정치연합 준비모임 등 활동을 이어갔다. 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동지들을 추모하기 위한 활동도 이어갔다. 때문인지 정건씨는 개인적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면서도 아버지의 동지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여러 역사적 사건을 복원하는 작업도 함께하고 있다.
요즘에는 아버지 이일재 선생의 평전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2009년 진실화해위에 의해 조작사건으로 복권됐지만,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이 청구한 재심 판결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어 대법원 판결이 나오는 대로 평전 작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정건씨는 “사실 아버지는 생전에 법원의 무죄판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셨다. 생전에 ‘저거(정부)가 무슨 유․무죄 판결을 하노’라고 하셨어요. 그들이 만든 조작 사건이니까. 우리는 이미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들의 판결이 무슨 의미를 가지냐는 거였다”고 말하며 “모르지. 보상금이나 조금 나오려나”하고 웃었다.
정건씨는 그저 웃으며 한 말이었겠지만 묘하게도 그 말은 돌아가신 이일재 선생이 현재 사회 상황을 실소를 금치 못한 채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미 사문화된 법령으로 전교조에 ‘노조아님’을 통보하고,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청구하는 정부 권력과 이를 또 법의 힘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단체들…. “저거가 무슨 유․무죄 판결을 하노”라고 했다는 이일재 선생은 마지막까지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이상원 객원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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