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그리고’ 도시 히로시마

▲히로시마 평화의 문에는 세계 각국 언어로 '평화'를 새겨넣었다.
▲히로시마 평화의 문에는 세계 각국 언어로 ‘평화’를 새겨넣었다.
“히로시마 복구에는 우리 조선인들의 피, 땀도 함께 포함돼 있어요. 우리 아버지도 그 일을 했었으니까요”

여행지에서 원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그 도시를 제대로 알 방법은 없다. 나처럼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외국어 공부에 손을 놓은 사람에겐 우리말을 잘하는 원주민을 만나는 건 축복이다. 이번 히로시마 여행에서 나는 축복을 받았다.

히로시마에서 재일교포 ‘광’ 선생님을 만났다. ‘광’ 선생님은 ‘little boy’가 히로시마를 다녀간 그해, 1945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 10일 오전 11시께, 원폭돔에서 만난 선생은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가 무엇 위에 서 있는지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히로시마 원폭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의 모습 그대로 남은 원폭의 흔적.
▲히로시마 원폭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의 모습 그대로 남은 원폭의 흔적.

원폭 직후 생존한 사람들은 강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물이었다. 더군다나 원폭 부상자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이 “물을 달라”였다고 할 정도로, 폭격 직후 히로시마에서 물은 ‘생존’과 동의어였다. 지금도 원폭돔 앞 위령비엔 당시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가득 찬 물병이 놓인다.

어린 시절, 선생에게 원폭돔은 놀이터였다. “저기에 새 둥지가 있었거든요” 히로시마 현 산업장려관이었던 원폭돔은 원폭 이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가, 이젠 원폭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상징물이 됐다.

▲원폭 이후 오타강변으로 원폭 슬럼이 형성됐다.
▲원폭 이후 오타강변으로 원폭 슬럼이 형성됐다.

원폭돔은 히로시마를 가르는 오타강이 모토야스 강과 나뉘는 곳에 있다. 그러니까 원폭 직후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그 강, 바로 옆에 있는거다. 선생은 특히 원폭돔을 기점으로 오타강을 따라 북쪽으로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기억했다. “바로 여기엔 조선인이 하는 고물상이 있었죠” 그가 가리킨 곳엔 히로시마 출신 아동문학가가 창간한 아동잡지 ‘빨간 새’의 문학비가 서 있다.

일본인들은 원폭 직후에도 조선인들과 섞여 사는 걸 꺼렸다. 원폭으로 부상 당한 조선인들은 당연히 죽는 거였다. 부족한 약품을 조선인들과 나눠 쓸리 만무했다. “아버지도 피폭자였어요.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서 배가 터졌다고 해요. 아버진 그때, ‘나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고 했죠. 조선인은 치료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선생은 오타강이 모토야스강과 갈라지는 곳 바로 위에 만들어진 다리(아이오이 교) 위로 나를 끌고 가 북쪽을 바라봤다. “이쪽에 특히 조선인이 많았어요. 저기 보이는 다리, 저 다리 위로 100미터쯤 더 가면 내가 살았던 곳이 있죠”

일본인들은 폭격 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을 ‘원폭 슬럼’이라고 불렀다. 히로시마 복구 과정에서 조선인 원폭 슬럼은 굉장한 골칫거리였다. 수많은 사람이 무단으로 토지를 점유해 나뭇더미로 얼기설기 집을 지어 살았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히로시마엔 없었다. 선생은 여러 차례 일본 정부가 슬럼을 강제 철거하고 몰아내려 했지만, 조선인들은 그때마다 뭉쳐서 버텼다고 기억했다.

▲일본 정부는 원폭 슬럼에 조선인을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다.
▲일본 정부는 원폭 슬럼에 조선인을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다.

일본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원폭 슬럼 인근에 그들을 수용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만들었다. 똑같은 외관으로 지어진 건물은 겉만 번듯했고 안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 정부는 슬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그곳에 집단 이주시키고, 슬럼을 철거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도 히로시마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칫덩이였을 거다. 원폭의 피해 도시,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는 남아 있는 조선인으로 인해 가해의 기억, 제국주의 군부의 중심 도시였던 기억을 지울 수 없게 된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에 만들지 못 하게 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부로 옮겨왔지만, 애초 위령비는 공원 밖에 있었다. 선생은 “(위령비가)원래 있던 곳을 보여줄게요”라며 나를 공원 밖으로 데리고 갔다.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가 최초에 세워졌던 터.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가 최초에 세워졌던 터.

위령비에서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 철교를 하나 건너면 오타강 서쪽 강변에 조성된 녹지대 한 곳을 선생은 가리켰다. “이곳이 원래 세워진 곳이에요. 조선인에 대한 멸시의 상징 같은 곳이죠” 조선인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설 곳이 없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도, 보호할 생각도 않았던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도 당연히 그 배경이다.

일·한 정부의 외면 속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생존을 위해 히로시마 재건 현장에서 일했다.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고물을 취급하거나, 막노동을 하는 거 말곤, 우리 아버지도 그 일(막노동)을 했어요”

▲히로시마평화공원을 찾은 일본 학생들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히로시마평화공원을 찾은 일본 학생들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평화공원을 둘러보다 보면 세계 각지에서, 일본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잔혹한 원폭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서고,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서일 거다. 하지만 처음 히로시마를 찾은 ‘조선인’은 어딘가 답답함을 느꼈다. 평화의 상징이 된 히로시마는, 무엇 위에 서 있나.

히로시마 평화기념박물관은 올해 완공을 목표로 보수 공사를 시작했지만, 내년 여름까지로 공기를 늦췄다. 보수를 위해 파헤친 박물관 아래에서 묻어버린 흔적들이 계속 발굴되기 때문이라는 게 선생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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