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하지 않은 창고의 창고지기, 정미나 씨를 만나다
경북대학교 후문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이상한(?) 카페, 아니 창고가 하나 있다. 창고라면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커피향이 풍기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곳. 이곳은 ‘설레임 충전 공간’ <어색하지 않은 창고(창고)>다. 창고에는 올해로 4년째 정미나 씨가 창고지기로 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녀는 창고로 흘러왔고, 지금도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흘러왔다’는 표현이 적절하구나 싶을 만큼 운명처럼 우연한 인연들을 만나면서 그녀는 이곳에 이르렀다. ‘시절인연’이라는 그녀의 표현처럼.
창고는 영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창고의 존재를 알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일정 정도의 돈을 받고 간단한 음료를 대접하지만 대부분은 직접 음식재료를 가지고 와서 밥을 해먹거나 술을 사가지고 온다. 창고의 운영이나 활용은 전적으로 창고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지고, 창고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이날은 매주 화요일 운영되는 <지구를 위한 밥상>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이 끝나는 시간을 기다려 편의점에서 맥주 두 병과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서 창고를 찾았다. 미나 씨는 주방에서 식기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런데 제가 인터뷰 할거나 있나요? 그냥 놀러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라며 말문을 열었다.
‘시절인연’ 따라 흘러온 <어색하지 않은 창고>
그녀가 창고에 까지 이르게 된 건 ‘시절인연’들과의 만남 덕분이었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대구 녹색소비자연대(녹소연)에서 그녀는 뭔가 참신하고 새로운 기획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 올레 1코스를 만든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대구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을 들은 그녀는 대구에도 올레길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녀는 녹소연에서 보행권을 담당하고 있었고, 대구 시내 한일극장 앞에 횡단보도를 설치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올레길 하면 재미 있겠더라구요. 걷다 보면 길이 좋다는 것도 알게 될거고, 길이 좋으면 흙길이 더 좋다. 시멘트 뜯어내자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구요” 대구 올레 2코스까지 완성될 즈음, 그녀는 공정여행에 눈길을 돌렸고 티벳 난민 자립 지원단체 ‘록빠’를 알게 되었다. 부산에서 열리는 록빠 행사에 참여했던 그녀는 그곳에서 대구에서 내려온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중 한 친구가 그녀를 당시 경북대 북문 대도시장 부근에서 운영되고 있던 <어색하지 않은 창고>를 소개시켜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안하는 걸 하고 싶었어요. 생각하다가 카페와 사무실이 접목 된 개념은 없다고 생각했죠. 순전히 혼자서 없다고 주장을 한거죠. 마침 그때 기존에 창고를 운영하던 친구가 창고를 내놓을 거라고 이야기하더라구요” 그렇게 그녀는 창고 운영을 맡았다.
처음 창고 운영을 맡을 때 그녀는 꽤나 높은 사명감에 차있었다. 많은 행사나 프로그램을 배치해서 많은 사람들을 끌고 오자는 목표를 세웠다.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우고 창고 ‘경영’을 했다. 지금까지도 진행하고 있는 <지구를 위한 밥상>, 연애 인문학 강좌 등 환경운동과 인문학 소양을 키우는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하지만 스트레스만 받았다. “힘들고, 외로웠어요.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창고가 필요하다고 말해놓고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죠”
이사, 그리고 변화
2010년 11월 지금의 장소로 창고를 이사해오면서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억지로 계획을 짜고,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지구를 위한 밥상>만 남겨둔 채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창고에만 홀로 묶여 있는 시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창고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무엇이든 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하고부터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가 하루 종일 창고를 비워도 창고를 지키는 친구들이 생겼고, 이런저런 프로그램들도 자연스럽게 운영되었다.
“생각해보면 카페라는게 그런 공간인거였어요. 나만 사람들이 오고 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손님이 들고 나듯 자연스럽게 관계들이 지속되는 거였죠. 더 이상 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저와의 관계를 거절한 것도 아니구요. 그냥 카페에 오지 않는 것일 뿐인거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더 수월하게 됐어요”
그렇게 창고를 자유롭게 하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었다. 인도, 라오스를 비롯해 제주도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강정마을에도 두 차례 다녀왔다. 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투쟁”을 위해서는 아니였다.
지난 3월 구럼비 바위 폭파가 실행될 때는 제주도에 있는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마을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일주일로 계획되어 있던 제주도 일정 중 절반 이상을 강정마을에서 보냈다. “선배가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고 살기 시작해서 놀러 갔었는데 폭파 소식이 들렸어요. 어쩌겠어요.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야지”
요즘에는 라오스 여행에서 구매 해온 ‘워스푼(War Spoon)’을 판매해서 판매 수익금을 강정마을에 전달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워스푼은 라오스 내전 당시, 미국이 라오스에 퍼부은 미사일의 잔해로 만든 숟가락이다. 당시 미국의 폭격은 75만명의 라오스 민간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아이러니 하더라구요. 사람들 목숨을 빼앗던 무기가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 다시 태어난 것이… 강정마을이 생각났어요. 제가 갔던 라오스 마을도 오름이 많은게 제주도랑 많이 닮아 있기도 했거든요”
‘시절인연’ 따라 흐르는 창고
창고 2호점 오픈… 1호점은 무인카페로
요즘 미나 씨는 창고 2호점 형식의 또 다른 공간의 운영 준비로 바쁘다.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던 곳의 계약이 올해 12월 30일로 끝나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상훈 대구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사무처장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대구 민예총, 독립영화협회가 함께 사용할 공간을 찾고 있는데 창고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대학 근처에 있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20대였어요. 이제는 창고에 오는 사람들을 조금 다양화 시킬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또, 요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는데 민예총 쪽에서 같이 하자고 하니까 좋은 기회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두 단체가 강당을 배치하면 그 공간을 제가 맡아서 운영하겠다고 했어요. 강당은 평상시에는 놀고 있는 공간이니까, 그걸 창고처럼 운영해보기로 한거죠”
그녀는 창고 2호점을 갤러리처럼 활용할 생각이다. 애초에 갤러리로 이용되던 공간이어서 따로 손을 볼 필요도 없다. 그곳에서 그녀는 기존 창고가 가지고 있던 성격에 더해서 생활 미술의 개념을 더할 생각이다. 그림, 미술이라고 하면 어렵게만 느끼는 사람들에게 누구나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전시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일상에서나 여행하면서나 그림 그리는 걸 편하게 생각하고 접했으면 좋겠어요. 장난처럼 그려놓은 그림도 전시해놓으면 멋져요” 그녀 자신이 첫 번째 그림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얼마 전 다녀온 라오스 여행에서 그려온 그림이 꽤 된다.
오는 6월 2일부터 그녀는 새롭게 오픈하는 창고 2호점에서 낮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만 잠깐씩 1호점에 들린 계획이다. 창고 2호점은 약령시 안에 있는 옛 ‘태 갤러리’ 자리에 있다. 1호점에서 진행하고 있는 <지구를 위한 밥상>은 일단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그녀는 지금껏 운영해 온 1호점도 지금 그 자리에 지속될 수 있었으면 한다. “일단은 무인카페를 시도해 볼 생각이에요. 무인카페로 잘 정착되면 어떻게든 재계약을 해서 공간을 유지시킬 생각이에요. 그게 아니면 이 공간이 정말 필요하다는 친구들에게 맡길 생각도 있구요. 무엇이 되었든 운영비가 문제예요. 후원회원 30명만 있으면 어떻게든 운영은 될텐데…”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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