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 “<나는 친박이다>는 정치예능, 본업은 따로 있죠”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를 만나다

알고보니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시네마테크) 대표는 <뉴스민> 사무실 근처에 살고 있었다. 저녁 전이라는 말에 그는 “내가 고기를 안먹어서”라며 집에서 가까운 보리밥뷔페점으로 기자를 끌었다. 5시 30분, 저녁을 먹기에 이른 시간이라 식당은 드문드문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커다란 비빔그릇에 오곡밥과 각종 채소를 가득 담아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비빔밥 두 그릇과 국수 한 그릇(한 그릇이었지만 사리는 두 뭉치였다), 각종 반찬 두 접시를 비웠다. 후식으로 제공되는 수정과까지 단숨에 마셨다. 그는 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 ‘엄청’ 먹었다.

“어렸을 때부터 고기를 안 먹었어요. 부모님이 아무리 먹이려고 해도 안 먹었죠.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든데, 잔인한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60kg이 넘는데, 원래는 내가 50kg이 안나갔어요. 어렸을때부터 원체 안먹었으니까. 작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학생운동을 시작하고 나니까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놓지 않으면 안되겠더라구요. 언제 먹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그때부터 엄청 먹기 시작했죠”

▲2012년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 (사진=뉴스민)
▲2012년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 (사진=뉴스민)

조선일보가 인정한 ‘좌파’ 팟캐스트 <나는 친박이다>의 진행자
“청취자들 스스로 정치적 각성까지 갈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는 팟캐스트 순위 10위권에 올라있는 <나는 친박이다>(나친박)에서 ‘반박’을 담당하고 있다. 나친박은 친박, 반박, 비박, 중박이 역할을 나눠 베일에 쌓여있는 ‘그네언니’의 모든 것을 규명하려 한다. 남태우 씨는 “나친박은 정치예능”이라고 표현했다. 그 표현대로 나친박은 각자가 캐릭터를 가지고 주어지는 주제에 따라 물고 뜯으면서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 안에서 청취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3월 22일 첫 회가 올라가자마자 나친박은 팟캐스트 순위 1위를 차지했고, 이후 꾸준히 10위권을 맴돌며 인기 팟캐스트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두 달만에 조선일보에 대표적인 ‘좌파’ 팟캐스트로 ‘인정’까지 받았다.

“<나는 꼼수다>가 파헤치고, 특종 터뜨려서 아군 모아서 ‘돌격’하는 스타일이라면, 우리는 색다른 걸 가지고 오지 않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식으로 요리한다. 우리가 요리를 해놓으면 청취자들이 자기들끼리 빈정거린다. 빈정거리면서 스스로 정치적 각성까지 갈 수 있으면 더 좋고”

나친박을 통해 일약 인기팟캐스트 진행자가 되었지만 그는 “나친박은 취미생활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가 주업으로 하고 있는 2002년에 창립한 시네마테크다. 시네마테크는 창립 이후 매년 꾸준하게 한국을 비롯한 일본, 프랑스, 스페인, 멕시코 등 다양한 나라의 예술, 독립영화 상영전을 개최해 왔다. 올해에도 지난 3월 1일부터 6일간 ‘모타이 마사코’ 특별전을 개최했고, 5월 18일부터 3일간 포항아트필름페스티벌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그가 지금까지 상영한 예술, 독립영화만 1000편이 넘는다. 1년에 100편 꼴이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정치개그를 희망하다

처음부터 이 일을 했던 건 아니었다. 85학번,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 절대악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는 당연하게도 학생운동의 길을 걸었다. 졸업 이후에는 사회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YS정부가 들어서면서 절대악이 무너졌고, 그는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입대를 했다. “학생운동에, 노동운동, 행불, 감옥도 갔다오고, 군대로 마무리된 20대는 한마디로 ‘여명의 눈동자’였다”

군생활을 마칠 즈음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앞에 나서 연설을 하는 일도 잦았고, 글을 써야 하는 일도 많았다. 자연히 말과 글을 가까이 하게 된 그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자보, 선언문 등 상투적이고 고답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는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는 후배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는 방송일을 했다. 케이블이 처음 개국을 하던 시기였다. 코미디 작가가 되려고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주변의 권유로 코미디언 시험도 두 차례나 봤다. 갈갈이로 유명한 코미디언 박준형과 함께 시험을 봤다. “정치개그를 하고 싶었어요. 패러디 개그를 하는거죠. 당시에 상품백화점 관련한 패러디 개그를 하곤 했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PD들 몇 명 밖에 없었어요. 알아들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곤 했죠” 그렇게 2년여를 프로덕션과 방송국을 오갔다.

“너무 좋은 컨텐츠를 썩히고 있는 것이 짜증이 났다”

2년만에 다시 대구에 내려왔고, IMF가 터졌다. 친구 회사, 선배 사업 등을 도와주다가 1999년에 최초로 대구지역 인터넷 대안언론을 만들었다. <저스트 2000>이라는 인터넷 신문이었다. 함께 운동을 했던 동료들 중 새로운 방식을 갈구하던 이들과 함께였다. 새로운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를 초청해 강연을 기획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특종도 몇 건 터뜨렸다. 하지만 재정난을 비롯한 어려움으로 1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흘러들어간 곳이 후배들이 하고 있던 독립영화패였다.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후배, 동료들을 보고 있으면 조금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좋은 컨텐츠로 내용까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알리지는 못하고 썩히는게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가 문제인게 너도 나도 감독을 하려고 하는거예요. 외국같은 경우에는 6대4, 5대5로 평론가, 배급자가 있어요. 짜증이 나더라구요. 이렇게 좋은 컨텐츠를 썩히다니… 그래서 내가 해보자고 나선게 시네마테크를 만드는데 까지 간거예요”

시작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독립영화라는 장르가 생소했다. 더군다나 문화적으로 많이 뒤쳐있는 지방이었다. 독립영화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고, 상영할 곳도 변변치 않았다. 돈도 없었다. “‘민주화’라고 하면 한마디로 설명이 되는데, 독립영화 하면 그저 ‘좋은일 하시네요’라는 반응이었다.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그렇게 3, 4년을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혼자 좋아서 일을 계속 했다. 그러던 중 운좋게 동성아트홀을 만났다. 오랫동안 무삭제 제한등급 상영관으로 있던 동성아트홀은 그즈음 컨텐츠가 없어 고민을 하고 있었고, 그는 공간이 없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제 동성아트홀은 대구지역의 유명한 예술, 독립영화전용관이 되었다.

방송에서부터 인터넷 언론, 영화, 지금의 팟캐스트에 이르기까지 그가 한 일은 맥이 닿아있다. 메시지를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전달해서 대중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그 역할을 영화를 비롯한 문화적 컨텐츠들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노동운동에서 임금 문제도 중요하지만 문화적인 요소도 꽤 중요하다고 본다. 울산 같은 경우에 연봉은 높아졌지만 문화적 마인드는 별로 변화가 없지 않나. 그러니까 노동자들도 자본가와 똑같이 노는거다. 잘사는 노동자는 골프치러 가고, 양주를 먹으러 간다. 그게 아니면 삼겹살에 소주 마시고 깽판치는 걸로 끝난다.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거다”

“영화는 시대와 사회의 거울”

그래서 변신을 거듭해온 그도 앞으로 ‘영화’를 놓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영화는 시대와 사회의 거울이다. 노동자들이 좋은 예술영화를 보고 토론하고 성장하면 노동자들의 문화가 달라질거다. 그러면 노사쟁의가 일어나도 해결할 수 있는 여지도 더 크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처럼 죽기살기로 끝을 보는 방식은 자본가에게도 노동자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저쪽은 돈을 잃고, 이쪽을 목숨을 잃는다. 다 죽어버리면 누가 득인가. 그런 것만 보여주면 청소년들은 좋아하겠나. ‘아, 나는 좋은 기업에 취업해야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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