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 ‘방콕’의 삶에서, 장애투쟁의 대모로

박명애 장애인지역공동체 대표를 만나다

400여년전 열도의 칼잡이들이 반도 땅을 유린할 때, 성 안에 우뚝 솟은 촉석루 위에서 칼잡이를 꽉 껴안은 채 남강으로 몸을 던진 논개의 도시 진주. 박명애 장애인지역공동체(장지공) 대표는 진주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박 대표의 할머니는 자유롭게 나들이를 할 수 없었던 손녀를 등에 엎고 자주 남강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그녀가 13살이 되던 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녀는 할머니의 등을 통해서 세상과 마주했다. 그녀는 그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철없는 동네 아이들은 할머니 등에 업힌 그녀를 그냥 보고 넘어가지 않았다. “다 큰 애가 할머니 등에 업혔다고 많이 놀림을 받았죠”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앉은뱅이 였어요.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내가 일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건 알았으니까요. 동생들이 실수로라도 그 말을 하면 불같이 화를 냈었죠” 박 대표는 전동휠체어에 이동을 의존하는 장애인이다. 그녀의 몸이 처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돌이 다가올 무렵 외할아버지 기일을 맞아 어머니와 찾은 외가에서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을 앓았다. “고열이 나고 경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병원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으니 병명이 뭔지도 모르고 나중에야 소아마비였다는 걸 알게 됐죠”

병을 앓고 난 다음부터 그녀는 제대로 서지 못했다. 몸에 마비가 찾아왔고, 부모님은 그녀가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죽는다고 한쪽으로 밀쳐놨는데 살아난 거죠”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사각형의 방안에서 이뤄졌다. “권투 선수들이 사각으로 막힌 링에서 싸우잖아요. 저도 딱 내가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학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니는 학교 가지 말고 엄마랑 집에 있자”며 딸을 품 안에 품었다. 지금보다 훨씬 장애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그 시절 그녀가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어린 세 동생과 어머니가 모두 학교를 따라와야 했다. “활동보조가 있던 것도 아니고, 화장실은 또 어떻고요. 교육열이 지금처럼 높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부정하거나 비관하지 않았다. 장애를 내보이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인 남동생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함께 놀았고, 친구들의 등에 업혀 밖으로 나다녔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10살까지만 해도 친구들 등에 업혀서 자주 나갔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엄마한테 화를 내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아 나는 나가면 안 되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후 그녀는 집안에서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가수 이미자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길 기다렸다. 이미자의 노래는 대부분 가사를 외웠고, 빈 종이에 가사를 외워쓰며 글쓰기 공부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친구들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등 여느 중학교 여학생처럼 연애소설을 즐겨 읽었다. “한때는 몸만 성하면 국문과에 가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죠”

▲2012년 박명애 장애인지역공동체 대표. (사진=뉴스민)
▲2012년 박명애 장애인지역공동체 대표. (사진=뉴스민)

“엄마, 무학은 무슨 학교야”라고 묻던 어린 딸아이…
야학의 문을 두드리다

열아홉이 되던 해 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해왔다. 사는 도시가 바뀌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방안에서만 생활했다. 방안 생활은 결혼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시로는 늦은 서른에 결혼을 하고 늦게 아이를 얻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 학년이 바뀔 때마다 가정환경 조사를 했다. 그때마다 학력란에 ‘무학’이라 적어넣었다. “1학년 숙제라고 가지고 왔는데 만만치 않더라고요. 거짓말로 중졸, 고졸 적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차라리 사실대로 적자 싶었죠”

어린 딸은 “엄마 무학은 무슨 학교야”라고 물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은 거라고 대답은 했지만, 딸이 커서 엄마가 배우지 못한 걸 부끄럽게 여기진 않을까 걱정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2000년 봄 질라라비 장애인 야간학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3월에 만들어졌다고 들었는데, 8개월 동안 갈 생각을 못했어요. 집에서 나갈 수도 없었으니까요”

11월 어느 날, 하루라도 좋으니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학교까지 이동하는 것이 문제였다. 야학학교는 아양교 부근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콜택시에 전화를 걸어서 나를 엎고 학교까지 갈 수 있겠냐고 물었죠” 가능하다고 말하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사랑 실은 교통봉사대>를 알게 되었다.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콜택시였는데 거기에 전화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받은 콜넘버가 180번이에요. 180번 아줌마 였죠”

3천원, 그녀의 집에서 학교까지 택시를 타면 택시 요금으로 3천원이 나왔다. “정말 얘들한테 쓸 돈이 없어도 3천원은 꼭 쟁여놓고 학교에 다녔어요. 학교가 저한테 삶을 찾아줬으니까요” 하루만 가보자고 생각했던 학교에서 그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고, 지금은 교장 선생님으로 그녀처럼 장애를 가진 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변화, 장애투쟁의 대모로
대구 야구장 장애편의시설 설치에서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 쟁취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그녀는 장애를 가진 자신이 장애로 인해 불편을 겪는 삶을 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장애인이라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장애인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2001년 가을, 처음으로 대구 야구장을 찾았을 때 그녀는 그 사실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당시 야구장에는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전무했다. 경기 시작 전에 도착한 야학학교 학생들은 4회말이 되어서야 경기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휠체어 장애인들은 선생님들이 업고 올라가야 했고, 화장실 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대구 야구장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가 하나씩 이뤄지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투쟁을 해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되는구나 하는 걸 그때 알게 되었죠” 그 이후부터 그녀는 대구지역 장애인 투쟁현장 최전선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2006년 봄, 그녀에게 장지공의 대표직이 제안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장지공의 대표가 된 그해 5월 18일, 그녀는 처음으로 싸움다운 싸움을 하게 되었다. 장애인 활동보조인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시청에 갔어요. 가기 전에 집안 정리를 싹 해놓고 갔죠. 서울에서 투쟁하는 영상을 보니까 지하철도 멈추고, 정말 거칠게 싸우더라고요. 어쩌면 다칠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깨끗이 정리하고 딸아이한테도 엄마 일주일 동안 못 들어올 거라고 말해놓고 나갔었죠. 무슨 독립투사도 아닌데(웃음)” 일주일을 예상했던 싸움은 43일 동안 지속됐다. 43일 동안 시청 앞에서 먹고 자며 노숙 투쟁을 전개했다.

다음해 1월에는 국가인권위 배움터를 점거하고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역시 목적은 같았다. 활동보조인 제도의 소관 부서인 보건복지부 유시민 장관은 2주일이 넘도록 장애인들이 목숨을 걸고 단식을 했으나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유시민 장관은 단식 18일차를 맞던 2월 10일 세계병자의 날을 기념해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명동성당은 국가인권위에서 불과 1k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명동성당을 찾아갔죠. 힘도 없는데 어쨌든 장관을 봐야 했으니까. 저만 유시민 장관의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승용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쫓아갔는데 계단 위로 도망가더라구요. 못 쫓아갔죠. 다행히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쫓아가서 우리를 좀 보라고 하소연을 했고, 도망가고, 쫓아가고, 그날 결국 유시민 장관은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어요”

그 일이 있고 5일 만에 보건복지부는 ‘만 18세 이상 기초생활수급자 및 최저생계비 200% 이하 가구 중증장애인에게 실시한다’는 제한규정을 폐지하고 매월 최대 80시간으로 제한했던 서비스 제공 시간도 180시간까지 확대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그때 300시간을 요구해야 했어요. 180시간이면 하루 6시간인데, 이것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긴 마찬가지죠”

“안되는 꿈도 꿔야… 70살까지는 활동하고파”

2000년 11월 처음 야학에 발을 디딘 이후, 이제 그녀는 “너무 오래 해서 총 맞으면 어떡하지”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오랫동안 대구지역 장애 운동의 대모로 서게 되었다. “이제 진짜 내 삶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었다. “나는 쉬는 게 싫어요. 지금껏 방안에서만 살아왔었으니까요. 누가 저보고 휴가 안가냐고 하면 옛날에 ‘방콕(방에만 콕 박혀있다)’에 많이 갔다 와서 안 간다고 해요. 늦게 활동을 시작했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70살까지는 계속 활동을 하고 싶어요”

그녀는 “아직 우리가 쟁취한 건 없어요. 이제 시작이에요. 많은 장애인들에게 봐라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 꿈을 가져라. 안되는 꿈도 꿔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라며 웃어보였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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