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대구경북 조정훈 기자를 만나다
곡주사(哭酒士)라는 곳이 있다. 대구 덕산동 떡전골목, 한때 이 지역은 300여 개가 넘는 떡집이 운집해 서울 낙원상가와 함께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대의 떡골목이었다. 하지만 84년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떡집은 여기저기로 흩어져버렸고, 몇 곳 되지 않던 떡집도 몇 해 전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하나, 둘씩 자리를 내주고 있다.
곡주사는 이곳 떡집 사이에서 오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자리에서 2, 30년 전의 추억을 기억하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맛좋은 막걸리를 맛 볼 수 있게 해준다. 원래 상호가 성주식당이었다는 곡주사는 자주 찾은 운동권 대학생이 ‘유신을 통곡하고 저주하는 선비들의 모임’이란 의미로 이름을 새롭게 붙여주면서 곡주사가 되었다.
7, 80년대 대구지역 운동권 대학생들은 시가지에서 시위를 한 후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아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정세를 토론하고 울분을 토했다. 곡주사 주인이었던 정옥순 할매는 ‘운동권 대모(代母)’로 불리며 형사들에 쫓기던 학생들을 숨겨주곤 했다.
조정훈(사진) 기자는 그의 나이 열일곱에 운동권 대학생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처음 이곳을 찾았다. 고등학생 시절 그는 시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며 시를 읽고, 쓰는 문학청년이었다. 고등학생이 읽는 시는 중학생이 읽는 시와는 달랐다. 김소월을 탐닉하던 소년은 김지하와 김남주를 만나며 청년이 되었다. 인터뷰를 하는 날 그는 “곡주사로 오라”며 후배기자를 추억의 장소로 이끌었다.
건설업체 관리직 사원에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6.2 지방선거, 정만진 교육감 후보 선거운동을 계기로
1991년 대구지역 청년들이 모여 대구청년문학회를 조직했다. 그 무렵 그는 대구 지하철 1호선 공사를 담당하던 건설업체에 다니고 있었다. 시와 문학을 좋아했던 그도 당연하게 문학회의 일원이 되었다. 가난한 문학회에 거의 유일한 직장인이었던 그는 모아놓았던 월급을 내놓고 문학회 사무실을 마련했다.
시와 문학을 좋아하던 그였지만 1994년 문학회가 와해되고 난 이후에는 줄곧 글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다. 건설업체의 현장관리, 자금관리 일을 하며 평범한 소시민으로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은 2010년 6.2지방선거 무렵이었다. 평소 가깝게 지냈던 소설가 정만진 선생이 시민추대후보로 교육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11명의 후보가 난립했던 대구 교육감 선거에서 그는 정만진 선생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n분의 1로 하면 진보교육감이 이길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그게 아니어도 대구지역에서 진보교육감이 나오는 데 힘을 보태야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기면 좋았고, 져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선거운동 초반에 느낀 건 대구지역 언론에 대한 실망이었다. 당시 보수 성향의 후보로 교육감 선거에 출마했던 우동기 영남대 총장에 대해서는 지역 언론이 조명을 많이 해주었지만, 정만진 후보에 대해서는 언론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론에 보낼 정 후보에 대한 보도자료를 쓰는 작업을 하다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지역 언론에 기대지 말고 직접 기사를 써버리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는 적당한 방법도 눈에 띄었다. 그 길로 시민기자로 직접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로 교육감 선거와 관련된 기사를 주로 다뤘다. “대구교육공대위, 범시민 진보후보로 정만진 교육위원 확정”, “대구 보수교육감 우동기 단일후보 확정”, “전교조 정치 탄압, 선거에 악용 말라” 등이 그 무렵 썼던 기사였다.
선거는 31%의 득표율을 보인 우동기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정만진 후보의 득표율은 11%였다. 선거는 끝났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숙제가 남겨졌다. 후보와 함께 대구에서 활동하는 여러 시민사회단체를 알게 되면서 힘들게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시민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고,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또 나라는 걸 느끼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됐다” 그 고민은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가 ‘기자’로서 현장을 누비게 만들었다.
본격적인 시민기자 활동
오해받아, 음료수 사들고 현장 찾기도
지금이야 대구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현장기자로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는 그 이지만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주로 대구지역 시민사회단체의 집회 현장이나 기자회견장, 파업현장을 찾아다녔던 그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낯선 사람이 작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다니니 당연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작은 디지털 카메라 들고 사진 찍고 다니까, 처음에는 ‘저 사람 누구야’, ‘뭐 저런 놈이 다 있노’ 의심을 하기도 하더라. 의심을 안 살려고 음료수를 사가지고 가기도 하고, 진짜 힘들었다. 동산병원 파업 현장에 음료수 사들고 갔더니, 음료수 가지고 취재하러 온 사람 처음 봤다고 하더라”
어려움이 현장에서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기자가 쓴 기사를 ‘잉걸’, ‘버금’, ‘으뜸’, ‘오름’ 등의 등급으로 구분했다. 이 구분으로 시민기자가 쓴 기사에 대한 원고료를 책정하기도 하고, 페이지 노출 정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정훈 기자가 쓰는 기사는 대부분 제일 낮은 등급인 ‘잉걸’로 구분되었다.
“대구 기사를 쓰면 항상 잉걸이더라. 현장에 쫓아가서 취재하고, 좀 더 정확한 기사를 쓰려고 사비로 카메라도 사고, 녹음기도 샀는데 언제나 잉걸이었다. 잉원고료도 2천원 밖에 안 되지만 그보다 페이지 노출이 잘 안 된다. 노력해서 쓴 기사를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허탈해지고 힘이 좀 빠졌었다”
하지만 그는 현장을 버리지 못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취재하고 더 좋은 기사를 써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올해 3월 그는 오마이뉴스 공채기자 모집에서 경력공채로 채용되었다. 그는 오마이뉴스가 창간되고 12년 동안 없었던 오마이뉴스 대구경북 첫 번째 주재기자가 되었다.
“오연호 대표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했다. 오마이뉴스가 진보언론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구 500만이 넘는 대구경북에 주재기자 한 명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서 빨리 주재기자를 두고 대구경북에 관심을 기울여 한다고”
“오마이뉴스가 나를 대구경북에 주재시킨 이유”
“ 대구지역의 시민기자를 많이 양성해내는 것”
시민기자에서 오마이뉴스의 주재기자가 된 그는 이제 또 다른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시민기자 시절처럼 현장을 찾아다니며 기사를 쓰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의 슬로건을 대구경북에서도 실현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나를 주재기자로 채용했으면 단지 현장기자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닐거라 생각한다. 그럴거면 그냥 시민기자로 두는게 비용도 적게 들지 않나, 어쨌든 오마이뉴스에서 대구경북 주재기자를 둔건 대구경북을 변화시키기는데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대구지역의 시민기자를 많이 양성해내는 것이 아닐까”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기자 학교에서 찾고 있다. 청소년 기자 학교, 대학생 기자 학교, 시민 기자 학교 등 대상이 누구든,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단지 시민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대구경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 그는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사를 쓰는 것에 더해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것을 도와줄 사람들을 찾고 있다. 기자 학교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 비용, 강사 등 시민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자 학교를 구상하느라 고민이 많다.
20여 년 전 까까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채,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김남주와 김지하를 읽었던 문학청년은 이제 마흔 중반의 기자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좀 더 큰 몸으로, 좀 더 자란 지혜로, 더 큰 고민을 하며,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이상원, 천용길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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