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 “안녕하세요.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입니다”

투쟁하는 현장에서 함께 하는 가수 임정득을 만나다

그녀는 작다. 언제나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무대에 선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안녕하세요.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입니다” 매번 노래를 시작하기 전 그녀는 이렇게 소개한다. 그녀는 늘 노동자, 농민, 장애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노래한다.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사진), 요즘 그녀는 새로운 앨범을 준비 중이다. 1집 앨범 이후 작업한 <소금꽃나무>, <일흔일곱날의 기억>, <어린왕자-후쿠시마 이후> 등 세 곡에 새로운 세 곡을 더해서 1.5집을 낼 생각이다. 인터뷰하기로 한 날에도 그녀는 앨범 작업을 하다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번 앨범이 1집보다 좀 더 ‘정득스럽다’”며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 앨범은 1집보다 많은 부분을 그녀가 책임지고 감독했다. 1집도 13곡 중 12곡을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일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았었다.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한 적이 없었기에 열정만으로는 곡의 편곡이나 앨범 작업 전반에 대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2009년 솔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4년차, 이제 그녀는 자기 음악의 색깔이 무엇인지, 무엇이 ‘임정득 다운’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다.

“1집은 지금도 많이 부끄럽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서 만들었나 싶어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지금도 1집은 보면 눈물이 뚝뚝 나요. 내가 낳은 아이 인 건데 너무 미안해요”

이번 앨범에 그녀는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했다. 기존 세 곡 외에 새롭게 작업하는 세 곡은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주지 않았던 음악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이번 앨범에서는 뮤직비디오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영상까지 직접 감독을 보고 있다. “어설프게 대중가요의 뮤직비디오를 흉내 내려 하지 말고, 날 것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한텐 맞다는 걸 느끼게 됐죠” 그녀 표현대로 좀 더 ‘정득스러운’ 이번 앨범은 뮤직비디오 작업만 순조롭게 끝나면 8월 말쯤에는 만날 수 있다.

▲ 2012년 7월, 길 위에 가수 임정득 씨. (사진=뉴스민)
▲ 2012년 7월, 길 위에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 씨. (사진=뉴스민)

교생실습까지 다녀온 그녀, 노래를 선택하다
반대 심했던 부모님, 이젠 응원해줘

지금은 많은 사람에게 노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그녀지만, 대학을 졸업하던 해 그녀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녀는 교생 실습을 나가며 교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교사가 될 딸을 위해 깨끗한 정장을 선물해주기도 했었다. 그즈음 대구에서 노래패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던 선배들이 함께 활동을 해보자는 권유를 했다. 선배들의 권유에 “별로 고민 없이” 그녀는 노래패 활동을 시작했다. 노래와의 인연도 대학 노래패 활동을 통해서였으니 그녀 스스로에겐 크게 특별할 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막내딸이 안정적으로 사는 길을 뿌리치고 고생길이 훤한 노래패 활동을 한다는 소식에 부모님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확신을 굳힌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완강하게 반대를 해왔던 부모님은 행복하게 음악 활동을 하는 딸을 보며 이제는 은근하게 응원을 해주고 있다. 어머니는 목에 좋다는 꿀이나 대추즙을 시골에서 보내주기도 하고, 개인콘서트를 할 때는 직접 보러 오기도 한다.

지금의 그녀가 있기까지는 대학 1학년 때 들어간 대학 노래패 <예사가락>의 활동이 주요했다.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없었지만 단지 노래하는 것이 좋아서 노래패에 들어갔다. 하필이면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에 들어간 것도, 어떤 정치적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거부감 없이 민중가요를 받아들이게 된 것도 그녀는 “시골 출신이라 그런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고향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는 그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다니는 ‘촌동네’였다. 매일 아침이면 시가지에 있는 학교에 가기 위해 10리길을 걸어 다녔다. 무더운 여름이면 하굣길에 물놀이를 하고, 배고프면 사과 서리도 하면서 집으로 갔고, 추운 겨울이면 갓 감고 나온 머리가 얼어 등교하는 동안 고드름이 맺히기 일 수였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녀는 대구로 ‘유학’을 나왔다. 도회지의 친구들은 그녀가 산딸기 따 먹으러 다닌 이야기를 하거나, 소 먹이러 산에 소를 몰고 다닌 이야기를 하거나, 물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멧돼지에 놀라 혼비백산한 이야기를 하면 이해를 하지 못 했다. 그렇게 언니들과 함께한 도시 생활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의 결핍,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은 아픔을 남겨 놓았다. 지금까지도 소장하고 있는 그 시절 일기장은 사춘기 소녀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음악 활동을 하는 데는 그런 경험들이 소중한 것 같아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영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 지난 6월 26일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 씨가 경북교육청 앞에서 열린 경북교육문화제에서 노래하고 있다.

홀로서기, 음악에 대한 욕심 생겨
한 달간 공연이 없기도… 현장 찾으며 노래하는 이유 찾아

아픔은 음악 활동을 하면서도 찾아왔다. 7년 동안 노래패 ‘좋은친구들’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문득 자기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그저 선배들이 만든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는 것에 만족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그들에게 힘을 북돋우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오랫동안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짬짬이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솔로활동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노래패에서 나오고 나니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회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래패에서도 막내였던 그녀는 그저 선배들의 울타리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역할을 하면 충분했다. 솔로가 된 그녀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공연 섭외 전화를 받고, 공연비를 받는 것까지 모든 것이 그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팀으로 활동하면서 팀의 울타리 안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나라는 사람, 임정득 대 누구로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어요. 그걸 솔로가 된 이후에 알게 된 거죠. 솔로가 되고 나서 보니까 사람들에게 저는 ‘좋은친구들’의 팀원, 임정득이었지, ‘임정득’이라는 개인으로는 어떤 관계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거였어요. 정말 충격이었어요. 원망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결국엔 전부 제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였죠”

아픈 현실을 직시한 순간, 그녀는 현장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한 번도 공연 의뢰가 없기도 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현장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노래를 계속 불러야 하는 이유를 찾아다녔다. 그때쯤 부산 영도에서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채길용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 문철상 금속노조 부산양산 지부장이 17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무작정 영도로 찾아간 그녀는 “저는 노래하는 사람인데요. 놀러왔어요”라며 눙치고 앉아버렸다.

쌍용차 해고자의 천막농성장도 찾아갔다. 2009년 77일 동안의 옥쇄투쟁을 풀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던 쌍용차 노동자들은 공장 밖에서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보았던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습니다”는 글귀가 ‘일흔일곱날의 기억’을 탄생케 했다. 대림 투쟁 현장, 풍산 투쟁 현장, 콜텍 투쟁 현장, 용산 투쟁 현장 등 그곳에서 그녀를 찾기 전에 그녀가 먼저 현장을 찾았다.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으면 노래를 불렀고, 기회가 없어도 함께 웃고, 울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한진, 쌍용차, 풍산 같은 그때 인연 맺은 동지들은 다른 팀이 공연하고 있는데 트위터로 ‘임정득 동지 보고 싶어요’라고 써요. 그걸 보면 정말 기분이 좋죠. 그땐 그렇게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는데… 지금은 앨범 작업도 있고, 공연 의뢰도 있어서 예전만큼 현장을 못 찾고 있지만, 앨범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다시 현장을 찾아 다닐 거에요. 한진은 다시 천막을 쳤어요”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힘을 얻는 현장에서 그녀는 노래할 이유를 찾았다.

현장 찾아다니는 작은 콘서트 꿈꿔
“그냥 ‘노래 좋아요’ 보다는 ‘어떤 노래가 좋아요’가 더 좋아”

그녀는 지금 투쟁 현장뿐만 아니라 노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작은 콘서트를 하며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관객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노래를 통해 그녀의 삶을 내보이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거창하게 선동하지 않고 그저 여기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용기와 힘을 주고 싶다.

지난 6월에는 그 일환으로 ‘동네음악회’를 시작했다. 7월에는 앨범 작업 때문에 바빠서 진행을 못 했지만 8월에는 다시 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 6월 처음으로 그녀가 사는 동네의 작은 어린이 도서관에서 진행한 ‘동네음악회’에는 음악회 당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는 후문이다.

그녀는 “그냥 노래 좋아요. 보다는 어떤 노래가 좋다고 해주는 게 더 기분이 좋아요. 내 음악이 그분에게 닿았다는 거니까요”라며 음악가로서 자신만의 마니아를 만드는 것이 하나의 목표라고 밝혔다. 노래하는 순간 가장 밝게 빛나는 그녀가 꿈과 목표를 이뤄가며 언제까지고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으로 우리들 옆에 남아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래본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노래 <상상하다>의 한구절과 함께 글을 마무리한다.

가난한 이가 자유로운 세상을 상상한다.
군대와 전쟁이 사라지는 세상을 상상한다.
더 많이 가지지 않고 행복한 삶을 상상한다.
사람이 사람 위에 서지 않는 세상을 상상한다.
– 임정득 <상상하다> 중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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