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근 대구환경운동연합 생태보존국장을 만나다
1,539km. 그 중 510km(33%). 16개 보 중 8개. 1,728km 자전거길 중 743km(43%)(4대강살리기추진본부 2009. 12). 강원도 태백 해발 1,573m 함백산 어느 골짜기에서 낙동강은 태어났다. 굽이굽이 안동호를 만나고, 상주를 옆에 두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흐른다. 구미를 지나고, 칠곡을 지나, 대구 달성군을 지나며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부산으로 흘러, 흘러 바다와 만났다. 강을 살린답시고 강 허리 이곳저곳을 끊어놓기 전까지.
정수근 대구환경운동연합(환경련) 생태보존국장(사진)은 요즘 낙동강을 자주 찾는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시퍼렇게 물든 강을 살피고, 비가 오면 여기저기 무너지고, 물이 새는 곳을 찾아서. 자전거길, 수변공원은 덤이다. 매일 수 십리 길을 왔다갔다하면 힘들만도 할 텐데 그는 “상식적으로 말도 되지 않는 4대강 사업이 나로 하여금 강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줬다”며 “이젠 이골이 났다”고 웃었다.
“인생의 분수령”된 앞산터널반대운동
풀여치와 교감,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
정수근 국장의 오늘은 앞산에서 만들어졌다. 스스로 “앞산터널반대운동은 인생의 분수령”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앞산에서 많은 것을 느꼈고, 경험했다. 2008년 앞산터널반대운동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그전까지 <녹색평론>에서 편집, 제작 일을 했다. 대학 4학년 때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교수의 수업을 들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과는 도시공학과 공대였는데, 이과 수업이 영 저한테 맞지 않았어요. 김종철 선생님은 워낙에 유명하시니까. 졸업 전에 수업을 들어봐야겠다 싶었죠”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을 일하다 녹색평론사가 서울로 옮겨가면서 일을 그만뒀다. 그 길로 앞산터널반대운동에 동참했다. 이전에도 생태운동 모임인 ‘땅과 자유’ 회원으로 이따금 집회에 참석했지만 주업이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못했다. 2008년 ‘앞산을 꼭 지키려는 사람들의 모임(앞산꼭지)’이 결성되면서 시민단체 중심이었던 운동이 개인 중심으로 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앞산터널반대운동은 2004년 6월 대구시가 앞산 달비골(대구시 도원동)에서 용두골(대구시 파동)까지 4.5km 터널을 포함한 4차 순환도로 건설 계획을 확정하면서 시작됐다. 공사는 시민사회단체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4년을 끌다가 2007년 12월 공사에 착수했다. 2008년에는 오랫동안 운동을 이끌어온 시민사회단체의 동력이 소진되고 달비골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비롯한 앞산꼭지들이 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앞산꼭지가 결성되던 그해 벌목이 본격화됐다. 앞산꼭지들은 산에 천막을 치고, 10M 상수리나무 위에 텐트를 치기도 하며 벌목저지투쟁을 펼쳐 나갔다. 벌목 인부들이 언제 올지 몰라 어두운 밤 홀로 산에 남아 천막을 지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 많은 밤 중 어느 가을밤 정 국장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위가 고요한 어두운 밤, 그는 홀로 텐트를 지키고 있었다. 쉬이 잠들 수 없었던 그는 관리사무소 가로등 불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왼쪽 어깨에 조용히 무언가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 나는 /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는 박형진 시인의 ‘사랑’이란 시처럼 작은 풀여치 한 마리가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산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작은 생명과 교감하는 순간 그는 앞산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경험은 앞산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기회를 그에게 제공했다. “앞산을 지키려 몇 날 며칠을 지내고 있었는데 그때 비로소 앞산 운동에 사명적으로 함께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앞산터널반대운동에 그가 본격적으로 결합할 즈음에는 공사가 시작되어 터널이 뚫리는 건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다. 패배가 예정된 싸움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를 그는 “앞산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팔공산을 대구의 아버지산, 앞산을 어머니산이라고 하지 않나. 어머니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였다”
2011년 1월, 환경운동연합 활동 시작하게 돼
매일 같이 부서지는 강… 심리적 좌절감 느껴
이후 그가 4대강 사업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2009년 봄 김종철 교수의 부탁으로 지율 스님과 함께 낙동강을 둘러본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이미 낙동강 유역의 공사가 시작되어 둔치 농경지가 갈아엎어져 있었고, 철새도래지가 군데군데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그걸 보는데 4대강 사업이 이런 거구나. 제대로 알게 된 거죠” 그해 겨울 앞산꼭지로 함께 활동한 이들과 ‘낙동강을 생각하는 대구사람들’을 결성했다.
지난해 1월, 2년째 낙동강을 생각하는 대구사람들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환경련에서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전부터 낙동강 관련 사업을 할 때마다 환경련과 함께 일하곤 했었다.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한 그는 환경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4년째 낙동강을 오가며 이젠 눈감고도 어디가 어딘지 알 정도로 낙동강을 훤하게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강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릴 적만 해도 집 앞 신천에서 멱 감고 놀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런데 산업화를 거치면서 강이 오염되고, 썩으면서 강과 인간이 멀어지기 시작했죠. 강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된 거에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거에요. 어떻게 보면 4대강 사업 덕분에 강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힘든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매일매일 망가져 가는 강을 지켜보는 일은 곤혹스러웠다. 강의 소중함을 알아갈수록 강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 힘든 일이 됐다. “강이 부서지는 걸 보는 게 인간성에 뭐가 좋겠어요” 강의 본성을 되찾는 운동이 아니라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 MB의 실정에 대한 반대로 운동이 진행되면서 겪는 심리적 좌절감은 컸다.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올해 초였어요. 안티운동이라는 게 스스로도 병들게 할 수밖에 없잖아요. 몇 년을 그렇게 지내왔으니 많이 힘들었죠.”
좌절감은 다시 자연을 통해 이겨낼 수 있었다. 마을 야산 초입에 두 평짜리 텃밭을 가꾸는 일이 요즘 정 국장에게 또 하나의 기쁨이 되었다.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건 훨씬 이전부터였지만, 올해 초부터 좀 더 애정을 가지고 가꾸게 되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매일 아침 6시에는 일어나 텃밭을 돌본다. 벌써 오이며, 고추를 수확하기도 했다. “텃밭을 가꾸면서 작은 존재에 대한 소중함이랄까, 생태의식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안티운동을 하며 잊어가던 가치를 다시금 알게 된 거죠”
4대강 사업, 인간의 ‘생태맹’ 깨친 MB의 작은 업적 될지도
강 죽인 MB 단죄… 강 복원 통해 창조적 계승 필요해
변증법이다. 정수근 국장은 인터뷰 도중 변증법적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앞산이 부서지는 걸 지켜보며 자신이 개명할 수 있었고, 강이 부서지는 걸 통해 강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정반’은 이뤄졌으니 이제 ‘합’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저도 강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강이 참 많은 생명을 품고 있잖아요. 낙동강을 터전 삼아 살아가 물고기, 두루미, 고라니… 그들에게 4대강 사업이 얼마나 경천동지할 일이겠어요. 우리가 앞으로는 4대강을 인간의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전체 생태계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회복하며 살아가야 할 거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생태맹’을 깨친 계기가 된다면 4대강 사업이 MB의 작은 업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도 그만큼 많이 깨우치는 시간이 됐거든요”
앞으로 그가 하고 싶은 일은 강을 복원시키는 작업을 통해 인간과 강이 다시 화합하며 살아가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강에 대한 폭거는 이미 이뤄졌다. 그는 그걸 통해 강의 소중함을 우리가 배웠다면 이제는 그 가치를 얼마나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인가가 남은 숙제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앞산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두고 지켜볼 생각이다. 어머니산, 대구의 허파를 뚫어버린 일이 어떤 영향으로 돌아올지 지켜보는 일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산과 낙동강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일도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진득하게 자료를 정리하고 되돌아볼 시간이 날 때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어요. 앞산과 낙동강이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것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것이 사명이란 마음으로 활동을 이어갈 거예요”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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