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민중예술… 길 위에서 시작된 것들”

한상훈 대구민예총 사무처장을 만나다

2006년 9월 28일 대구가톨릭병원 로비에서 사진전이 열렸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아름다운 절경을 담은 사진,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사진 80여장이 병원 로비에 전시되어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한 사진기 수리공 이야기’가 사진전의 제목이었다. 그날 로비에 전시된 사진들은 어느 사진기 수리공이 수리한 사진기로 찍은 사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많은 사진을 탄생하게 해준 사진기 수리공은 다음 날 아침 전시회가 진행 중이던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서른다섯, 젊은 사진기 수리공과의 인연

한상훈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대구지회(대구민예총) 사무처장(사진)은 그의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 사진기 수리공의 죽음으로 빚어진 사진전은 이후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있는 수공업자들의 모습을 재조명하는 사진전으로 발전했고, 그 다음해에는 그 모습을 찍고, 그리는 예술인들의 모습을 조명하는 사진전으로 거듭났다.

한상훈 처장이 그 사진기 수리공과 인연을 맺은 건 그가 대구민예총에서 활동을 시작하기 2년 전인 2002년이었다. 그 무렵 한 처장은 우연히 대구 중앙지하상가 3지구 재개발 저지 투쟁을 함께하고 있었다. 사진기 수리공은 중앙지하상가 비상대책위의 총무를 맡고 있는 카메라 판매상의 상점에서 수동 카메라를 수리했다. 원래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한 처장은 카메라에도 관심이 많았다. 둘은 카메라를 매개로 자연스레 친분을 쌓았다.

당시 한 처창은 유시민이 창당한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의 대구 실무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후 유시민을 포함한 개혁당 다수가 열린우리당에 흡수되면서 한 처장은 개혁당을 탈당하고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다. 2004년에는 중앙지하상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인 후보를 추대하고 선거운동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해에 한 처장은 선배의 소개로 대구민예총에서 일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재개발 투쟁이 대구시와의 합의로 마무리 됐지만, 한 처장과 사진기 수리공은 친한 형, 동생으로 관계를 이어갔다. 한 처장은 그에게 대구민예총 흑백사진집단의 회원 가입도 권유하며 함께 하는 폭을 넓혀갔다.

서른다섯. 간암. 2년 뒤 많지 않은 나이에 생사의 갈림길에 외로이 선 사진기 수리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한 처장과 지인들은 사진전을 기획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수소문해서 모았다. 전시회 당일 “당신을 위한 전시회가 열렸다”는 말에 젊은 사진기 수리공은 눈을 깜빡여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떠났다. 한 처장의 기억 한편에서 그 일은 지금까지 민예총 활동을 이어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2012년 9월 만난 한상훈 대구민예총 사무처장. (사진=뉴스민)
▲2012년 9월 만난 한상훈 대구민예총 사무처장. (사진=뉴스민)

시계공 아버지와 운동권 형의 기억
“민중예술… 길 위에서 시작된 것들”

어린 시절, 한 처장은 ‘고쳐도, 고쳐도 안 되는 시계 가져오세요’라고 적힌 시계방에서 어떤 고장 난 시계도 뚝딱 고쳐내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대구 방천시장 인근에서 살았던 그는 매일같이 집 앞 신천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문구점에서 아리랑 성냥을 사 감자를 구워먹곤 했다. “예전에만 해도 신천에 야생이 살아있었거든요. 그 야생의 공간에서 어떻게 놀면 재미있을까를 고민하며 지냈죠. 그때의 경험, 상상력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지도 모르죠”

여섯 살 위의 형은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형이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전교조 설립으로 해직 교사가 대량 발생했다. 형은 친구들과 집에 모여 작당모의를 하곤 했다. 그런 형의 모습을 보고 자란 한 처장이었기에 학생운동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 1학년 처음 대면한 학생운동의 모습은 실망적이었다. “선배가 신입생들을 데모하러 데리고 나가기에, 최소한 설명은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닥치고 나오라’고 하더라구요. 반발심에 그날 데모 대오에서 이탈했고 이후 계속 학생운동과는 인연이 없었죠”

이후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채 그는 바깥으로 나돌았다. 주로 ‘햇살’이라는 영화패 활동에 치중했다. 개혁당, 민노당, 대구지하철참사대책위 등을 거쳐 정착한 곳이 대구민예총이다. 그가 애초 대구민예총에서 맡은 일은 민예총에서 발행하는 책자를 편집하고 제작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함께 일하던 민예총 전임활동가가 일을 그만뒀고, 그 길로 한 처장은 민예총에서 붙박이로 9년차를 맞았다.

한 처장이 대구민예총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민예총도 조금씩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민족예술, 민중예술에 대한 그의 견해가 그동안 활동해온 선배들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과거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민족 예술, 저항 예술을 주요하게 생각했던 선배들과 달리 그는 대중문화, 인디문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풍물과 비보이를 접합시키고,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을 융합시키는 일을 기획하곤 했다. 일부 선배들은 그런 그를 당혹스럽게 바라봤다.

“당시만 해도 미국 문화를 싫어하는 선배들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때는 풍물이나 비보이나 모두 길에서 시작한 민중예술이거든요. 풍물이란게 상놈들이 가을걷이하고 어울려서 신명나게 치고, 놀고, 다른 마을이랑 어울리면서 시작된 거고, 비보이도 흑인들이 총 대신 춤을 통해 싸운 문화잖아요. 둘 다 핍박받는 민중에 의해 길 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민중예술인거죠”

그는 그저 ‘민족’을 중요시하는 예술이 이 시대에 필요한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라고 봤다. “독재 시절에는 타깃이 하나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타깃이 많아졌죠. 복잡다단한 시대가 됐는데 한 가지에만 머물러 있을 순 없죠. 민예총이 해야 하는 일이 바로 민중예술이 한길로만 빠져서 도태되지 않도록 하고, 그 속에서도 운동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는거죠”

‘한 사진기 수리공 이야기’에서 ‘예술밥 먹는 사람들’까지
“민중예술과 대중이 만날 수 있도록…”

2006년 절친했던 사진기 수리공의 회복기원 사진전으로 기획했던 ‘한 사진기 수리공 이야기’는 한 처장의 이 같은 고민을 좀 더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시작은 그저 친한 형을 추모하기 위한 사업이었지만 그 사업이 다른 사진전으로 이어지면서 민예총, 민중예술이 가지는 한계점을 직시할 수 있게 됐다.

한 처장은 ‘한 사진기 수리공 이야기’를 기반 삼아, 2007년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장인들’이라는 사진전을 기획했다. 개인사업자였기 때문에 일하는 노동자로서의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사진기 수리공처럼 노동 사각지대에 있는 수공업자들을 찾아 나섰다. 자전거 바퀴 펑크를 때우는 수공업자, 작은 티켓 박스에서 빵을 파는 수공업자, PVC 배가 나오면서 일감을 잃은 목조배 수공업자 등 여섯 수공업자들의 삶과 노동을 담은 사진전을 진행했다.

다음해에는 고급 예술이 아니라 손발로 뛰는 예술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을 담은 ‘예술밥 먹는 사람들’이라는 사진전을 기획했다. 뒤이어 한국 농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흙의 사람들’을 기획했다. 그런데 ‘흙의 사람들’은 사진전으로 대중을 만나지 못했다. 돈 때문이었다. “두 번 다 관에서 지원금을 받았어요. 그런데 세 번째는 지원을 못 받았고, 사진전을 이어가지 못했죠. 그때 열패감을 좀 느꼈어요. 아무리 좋은 기획, 좋은 예술이라도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는 지역마다 지회를 두고 있는 민예총이 지회마다 성격을 달리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광주처럼 지원이 넉넉한 곳은 민족예술, 저항예술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사업이 대중적으로 흥행하든 못하든 관에서 지원을 해주니까. 그런데 대구나 부산처럼 지원이 넉넉하지 못한 곳은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죠” 이런 현실적 조건과 민중예술에 대한 한 처장의 의식이 만나면서 대구민예총은 지속적으로 대중과 함께하는 예술을 모색하게 됐다.

한 처장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대중과 만나는 민중예술을 기획하고 시도할 계획이다. “대중이 볼 때 민예총이 하는 예술은 거리감이 있어요. 민중을 만나는 예술을 해야 하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쪽으로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놀이터, 소셜 아트 페스티벌은 그걸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거예요. 실패를 하더라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민중예술과 대중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게 저의 역할인 것 같아요”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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