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헌책방과 영화감독

물레책방지기 장우석씨를 만나다

부산 보수동만큼은 아니었지만, 한때 대구도 헌책방이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구역 굴다리, 시청, 남문시장 등지에 약 100곳의 헌책방이 각기 사연을 가진 책을 품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80년대 복사기, 90년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시나브로 사라지기 시작하던 헌책방은 이제 10여곳 만이 남아 과거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5월 대형 중고서점이 대구 중심가에 떡하니 문을 열고부터는 과거의 영광마저도 지워질 위기에 처한 것이 오늘날 헌책방의 현실이다.

그렇게 하나둘 문을 닫는 헌책방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던 30대 청년이 있었다. 문을 닫는 헌책방 중에는 그가 자주 찾던 단골집도 있었고, 그에게 이런저런 책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주인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의 안타까움은 3년 전, ‘내가 헌책방을 꾸려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으로 발전해, 직접 헌책방을 열기에 이른다. 대구 수성구 범어동 수성경찰서 뒷길에 위치한 물레책방의 책방지기 장우석(사진, 38)씨의 이야기다.

▲2013년 10월, 대구 수성구 물레책방에서 만난 장우석 감독(사진=뉴스민)
▲2013년 10월, 대구 수성구 물레책방에서 만난 장우석 책방지기(사진=뉴스민)

우석씨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국어교사인 아버지의 손을 잡고 헌책방에 발길을 시작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값싼 참고서를 구하려 헌책방을 찾곤 했고,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수집했다. 집 안에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책을 사모아 따로 책 창고를 하나 마련해야 할 정도로 책 수집에 열성이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모은 1만권으로 2010년 4월 물레책방을 열었다.

물레책방, “물레는 순환을 의미”
같지만 다른 헌책… <몽실 언니> 초판본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물레책방의 ‘물레’는 간디의 물레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우석씨는 “물레는 순환을 의미한다”며 “새책방은 책이 팔리면 끝이지만, 헌책방은 사람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순환을 통해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다”고 말했다. 돌고 도는 책의 순환은 그가 헌책방에 애착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처음에는 헌책방의 싼 가격이 매력적이었다. 나중에는 그보다 헌책방까지 오게 된 책들의 사연이 더 매력적이었다. 돌아가신 작가의 서명이 있는 책을 만나면 아련한 감정이 들기도 하고, 절판되어서 이제는 출판되지 않는 책을 만났을 때의 기쁨도 있다. 헌책은 같은 책이이라도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은 없어진 서울 청계천변의 한 헌책방에서 ‘창비아동문고 61’로 출판된 권정생 선생님의 문고본 <몽실 언니> 초판본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500원을 주고 사온 책을 그는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 품에 꼭 안아보았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최근에는 출판되자마자 다시 출판사에 의해 회수, 절판되어 찾기 힘든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는 책을 어렵게 구했다.

2003년, 한길사에서 이오덕 선생이 살아 생전에 권정생 선생과 나눴던 서신을 묶어 낸 이 책은 출판 직후 출판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던 권정생 선생이 출판을 반대하면서 많은 독자를 만나지 못했다. 권정생 선생은 서신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는 걸 원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뜻을 출판사에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레책방 한켠에는 절판된 책 중에 우석씨가 손수 구한 책들로 채워진 공간이 있다. 이 책들은 판매를 하지 않는다. 대신 책방을 직접 방문한 손님들은 그 자리에서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책을 읽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또, 물레책방에는 대구 소재 출판사나 대구 작가들의 책만 따로 모아놓은 공간도 있다. 우석씨는 “요즘 서점에서는 자본력 있는 대형 출판사의 책들만 눈에 띄게 진열되다 보니 소자본의 지역 출판사의 좋은 책은 소개될 기회를 잃는다. 그래서 지역 출판사나 작가들의 책을 소개하는 역할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영화감독 장우석 <끝나지 않은 세월>을 만나다
터닝포인트, 대구의, 대구에 의한, 대구를 위한…

▲ 인터뷰를 마친 후, 장우석씨는 또 다른 언론사와 헌책방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인터뷰를 마친 후, 장우석씨는 또 다른 언론사와 헌책방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물레책방은 지난 4월로 3주년을 맞으며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원래 우석씨는 이렇게 이르게 헌책방을 시작할 계획이 없었다. 대구에서 여러 편의 단편 작품과 다큐멘터리를 만든 영화감독인 우석씨는 그 무렵에도 미도다방(대구 약령시, 1982년에 문 연 뒤 대구경북지역 정치인, 문인들의 명소됨)을 무대로 한 극영화의 프로덕션을 진행 중이었다. 프로덕션 중 그의 헌책방에 대한 애착을 알고 있던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물레책방을 열게 된다. 이때 함께 문을 연 곳이 지역기반 출판사를 모토로 한 도서출판 한티재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우석씨는 2002년 우연히 선배의 요청으로 단편영화 작업 현장에서 붐마이크를 드는 일을 경험했다. 처음 접한 영화 제작 현장에서 그는 묘한 매력을 느꼈다. 감독이 원하는 세계를 스크린에 구현하는 작업이 인상적이었다. 감독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배우, 스텝으로 함께 만들어낸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그 길로 그는 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영화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2003년 2월 첫 번째 작품을 선보인 우석씨는 충무로에서 잠시 동안 연출부 막내로 일하다가 열악한 영화인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대구로 내려왔다. “전공자도 아니고, 서울에 연고도 없었다. 나 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도 여전히 연출부에 있더라. 서울에 그대로 있다가는 내 영화를 찍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로 내려온 그는 호흡이 잘 맞던 지인들과 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작업에 들어갔다. 다행히 그 무렵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각종 영화제는 능력 있는 신인 감독들의 등용문이 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석씨는 좋은 작품을 영화제에 출품하고 정식으로 감독으로 데뷔하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 찾아왔다. 2005년 여름 우석씨는 2004년부터 프로그래머로 합류한 대구 평화영화제 초청 작품을 찾던 중 제주4.3사건을 주제로 제주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알게 됐다. 적은 예산으로 의미 있는 영화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감독을 초청하는가도 중요했지만, 초청한 감독과 얼마나 질적으로 내밀한 소통이 이뤄지는가도 중요했다.

“KTX가 생긴 이후로는 서울에서 감독을 부르는게 꺼려졌다. 지방에서는 영화제를 기회로 감독과 직접 이야기도 하고, 밥 한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기쁨이었는데, 이전까지는 항상 1박2일로 대구를 찾던 감독들이 이때부터 당일치기로 와서 영화도 같이 안보고, GV(Guest Visit)만 30분 정도 하고 가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 감독님은 시사회를 해주고 싶다면서 사비로 오셔서 영화제 스텝들에게 시사회도 해주시고, 영화제 내내 같이 있으면서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인간적으로 다가왔었다”

이 감독이 바로 지난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독립영화 <지슬>의 원작, <끝나지 않은 세월>의 고(故) 김경률 감독이다. 김경률 감독은 <끝나지 않은 세월>을 제작한 그 해 겨울, 영화제작을 위해 진 빚과 완성도가 높지 않았던 영화에 대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뇌출혈로 사망했다.

“감독님이랑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단시간에 친해졌었다. 한번은 같이 술을 먹다가 ‘영화를 왜 이렇게 못 만들었느냐’고 타박을 했었다. 너무 좋은 소재였는데, 생각보다 영화가 완성도가 높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타박을 했더니 형님이 ‘육지것들’이라고 하시면서 ‘잘나고 똑똑한 놈들은 전부 육지로 떠나고 나 같이 못난 놈들만 제주에 남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라도 남아서 제주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예, 예’ 하면서 지나갔는데 장례식을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하필이면 자신의 음력 생일에 세상을 떠난 김경률 감독의 장례식에서 우석씨는 홀로 남은 김 감독의 노모가 내어주는 미역국을 받아먹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서 어떻게든 서울로 올라가려고 한 자신과 제주에 남아서 제주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 김 감독을 비교했다. 이 일을 계기로 대구에 남아서 대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후 우석씨는 주로 대구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나 단편 작업들을 하게 된다.

“10월항쟁 영화 계획하고 있어…”
“문화예술 통해 보수적 대구에 균열 내고파”

물레책방의 운영이 안정화에 접어든 지금 우석씨는 그동안 미뤄뒀던 영화 작업을 다시 시작하려 준비하고 있다. 오랜 휴식 끝에 다시 영화감독으로 복귀하는 그가 복귀작으로 준비하는 작품은 대구 10월항쟁이 소재다. “김경률 감독처럼 지역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도 있다. 10월항쟁 자체가 4.3처럼 제대로 복권이 이뤄지지 않는 사건이기도 해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본적으로 자신을 문화예술인으로 규정하는 우석씨는 10월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비롯해 지속해서 문화예술을 통해 보수적 색채가 강한 지역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정치를 통해 대구에 변화를 만드는 일은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문화예술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지역의 젊은 친구들이 지역을 떠나지 않아도 밥벌이를 해결 할 수 있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대구에 남아야 지역을 좀 더 재밌고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이상원 객원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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