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우드맥 정효진 사장을 만나다
정효진(사진, 53)씨는 10년전 이 무렵 음악카페 ‘우드맥’의 문을 열었다. 올해로 10년을 맞이하지만 정확하게 2월 어느 날이 개업일인지 기억하지는 못한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음악을 즐기는 것을 음악에 대한 예의로 알 듯, 겉멋 싫어하는 성격이 날짜 따위는 무심하게 기억 속에서 지웠는지도 모른다. 특별하게 10주년 행사도 준비하진 않았다. 그저 “지난 10년간 밥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손님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로 10년의 소회를 대신할 뿐이다.
5일 밤 8시 경북대학교 정문 맞은편 골목길에 자리한 우드맥에서 영업 준비를 마친 정씨를 만났다. 그는 시종일관 유쾌하게 질문에 답하며 “하하하하” 호쾌하게 웃었다. 한 시간.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터뷰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지 못함을 안다. 하지만 부침이 심한 대학가 점포 중 1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킨 우드맥이 그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10년 세월, 손님과 함께 만들어간 우드맥
단골이 그린 벽화와 낙서… 그리고 사진
저녁 7시 무렵이면 “음악카페 우드맥”의 간판에 불이 들어온다. 간판 아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문이 하나 있다. 그 문을 열면, 시간을 30년은 되돌려 놓은 듯 어두컴컴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로 들어서면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파란색 청바지를 입은 다섯 남자가 손님을 맞이한다. 유라이어 힙(Uriah Heep), 1969년 영국서 결성된 5인조 록밴드다.
“송 화백이라고 우리집 단골 화가가 그려준 그림이다. 개인적으로 아끼는 화가인데 그림을 정말 잘 그린다. 송 화백이 2년전에 그림을 그려준다기에 저들로 그려달라고 했다. 크게 좋아하는 밴드라기 보다는 자유로운 느낌이 많이 나서 골랐다. 50% 완성이라고 하더라. 사진처럼 똑같이 그릴 수 있다는 걸 그냥 그 정도에서 그만두라 했다. 그림이 너무 사실 같아도 재미없잖아”
우드맥에는 손님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입구 정면으로 보이는 벽면에 송 화백이 그린 유라이어 힙이 있다면 입구 왼쪽 벽면에는 블루스의 대부 비비 킹(Riley B. King)과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이 검정색 선글라스를 쓰고 오픈카를 탄 채 기다리고 있는 식이다. 비비 킹과 에릭 클랩튼도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단골손님이 7년전에 그려줬다. 벽면마다 손님들이 쓴 낙서나 정씨가 직접 찍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진까지, 우드맥은 곳곳에 그와 손님들의 추억이 묻어있다.
“손님들이 와서 펜 달라고 하더라. 그럼 펜을 주면서 ‘니가 쓰고 싶은거 써봐라’ 그랬다. 몽둥이 들고 뒤에 서 있으면 좋은 이야기만 쓰는 거지(웃음). (낙서는) 다 읽어봤다. 오갈 때 새로운게 쓰여 있으면 자연적으로 눈이 간다. 사진은 초기에 오는 손님들을 많이 찍었다. 같이 찍자고 하면 더러 같이 찍기도 하고 그랬다”
그림, 낙서, 사진도 많지만 우드맥에 가장 많은 건 역시 음반, 특히 LP판이다. 1969년 발매된 김추자의 앨범부터 1992년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까지,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LP판이 우드맥의 또 다른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우드맥을 시작한 것도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음악카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촌형 전축으로 들었던 팝송의 기억
우드맥을 시작하기까지…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걸 해보자”
왜 그가 이토록 음악을 좋아하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 국민학교를 다닐 땐 부모님이 좋아하는 이미자, 배호의 노래를 좋아했다. 팝에 빠지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사촌형이 별표전축(천일사에서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 전축)을 사서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크게 팝송을 들었다. 사촌형의 전축을 통해 토미 로(Tommy Roe)가 부른 ‘디지(Dizzy)’를 처음 접했다. 사촌형은 토미 로의 노래를 자주 들었다. 가사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음악을 즐기는데 언어의 장벽 따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음악에 대해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러니 아는 것도 많지 않다. 하지만 즐기는 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소리 음, 즐길 락. 개인적으로는 그거면 된다고 생각한다. 즐기면 된다. 알면 더 좋겠지만 즐길 수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한 적 없다는 말처럼 그는 학창시절 그 흔한 밴드 활동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스무살이 되고부터 친구를 따라 통기타를 배워본 게 음악활동(?)의 전부다. 그마저도 아버지가 기타 3대를 부숴버리면서 시나브로 접할 일이 없어졌다. 친구 기타도 빌려서 다시 쳐볼까 했지만 그것까지 아버지는 부숴버렸다. 그 시절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아들이 “딴따라”가 되는 걸 원하는 아버지는 없었다. 요즘은 그때 배웠던 가락으로 가끔 손님들이 원할 때 연주를 하곤 한다.
이후 특별하게 음악을 접할 일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잠깐 서울 생활을 하다가 대구로 내려와 섬유제조업체를 다녔다. 엄혹했던 5공,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억압받던 노동자들은 하나, 둘 노조를 결성해갔다. 1989년 그도 동료들과 노조를 만들었다. 노조가 뭐하는 건지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당시 비산동에 있던 대구노동조합연합 사무실을 오가며 노조 조직을 위한 지식을 쌓고 노조 결성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노동자들이 너무 인간 대접을 못 받던 시절이었다.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뭐라고 말할까… 억압받는 것에 대한 불만, 가난 때문에 사회 반감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 건 있는데 권위주의를 너무 싫어한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기도 했고, 남들이 다 좋다고 하면 괜히 하기 싫어지는 기질이 있다”
문제는 노조를 결성한 이후였다.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회사에 “찍혔다”. 결성 후 1년간 일을 하지 않아도 누구도 제재하는 사람이 없었다. 1년 만에 스스로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것저것 안 해 본 것 없이 다해봤다. 점포에 세를 얻어서 생활용품을 판매하기도 해보고, 택시 운전도 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판은 계속 모았다. 꿈은 있었거든. 어느 순간 ‘이거 지금 안하면 평생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사는 인생 내가 해보고 싶은걸 하고 살자 싶었다. 밥은 안 먹겠나. ‘어차피 내 팔자에 돈은 없는 것 같고 밥만 먹으면 되지’ 하면서 시작했다”
손님 가려 받는 음악카페
“기본 가락이 있고, 품성 좋고, 음악을 좋아해야”
2003년 2월 그동안 모았던 LP판을 밑천삼아 우드맥을 열었다. 우드맥이란 이름은 6, 70년대 영국의 록밴드 플리터우드 맥(Fleetwood Mac)에게서 빌려왔다. 처음은 힘들었다. 듣고 싶은 음악은 컴퓨터로 다 들을 수 있는 시대였고, LP가 뭔지도 모르는 세대가 대학을 다니는 시절이었다. 모든 것을 빠르게 하는데 익숙해진 세대에게 음악 한곡을 듣기 위해 LP를 찾고, 듣고 싶은 트랙의 홈을 찾아 턴테이블 위에 올리는 작업은 수고롭게 느껴질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손님까지 가려 받았다.
“보다시피 공간이 작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공간은 올 사람이 와야 한다. 기본 가락이 있고, 품성이 좋고, 음악을 좋아해야 한다. 거기에 자유로운 영혼의 기질까지 보이면 금상첨화다. 술을 많이 먹으면 더 좋다. 내가 술을 팔아야 하니까(웃음). 아니다 싶은 사람을 받으면 피곤하다. 옆 테이블 손님들에게도 민폐를 끼치게 마련이다”
까다로운 조건 덕분에 초반에 월 6, 70만원도 겨우 벌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10년을 두고 오는 단골손님이 생겼고, 손님 한명, 한명에게 좀 더 마음을 다할 수 있었다. 매번 늦게까지 남는 손님과는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새벽 1시면 간판에 불을 끄지만 그렇게 남아 있는 손님이 있으면 4시고 5시고 함께했다. “365일 중에 380일을 만취 상태로 집에 기어들어갔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손님과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다. 손님들이 그린 벽화와 낙서, 사진은 그냥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같이 같이 취하는 통에 술값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적도 많다. 손님도 취하고, 나도 취하니까. 안주값 계산 안하고, 술병도 잘 못 셌다. 20병 마셨는데 15병으로 세고 계산하는 식이다. 같이 먹다가 취하면 마지막엔 피처 두, 세병은 ‘내가 산다’고 하면서 그냥 준 적도 많다. 다음날 아침에 정신 차리고 나면 후회하면서 취하면 또 그랬다. 요즘에는 이게 내 마지막 밥줄이다 싶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계산한다(웃음)”
“무궁무진한 음악… 좋은 음악이 너무 많다”
“수만 가지 최고 앨범 중 하나만 어떻게 고를 수 있겠나”
밤 9시,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40대로 보이는 여성 둘이 우드맥을 찾았다. 단골인 듯 정씨는 “어, 니 오랜만이네”하고, 여성 둘 중 한 명이 “선배, 맥주랑 준비해줘요. 좀 더 올거야”한다.
잠시 후 교수, 조교, 학생으로 보이는 일군의 무리가 들어왔다. 금세 몸이 바빠진 그는 기자에게 “맥주 한잔하고 가라”며 맥주를 가져다주곤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선배, 신청곡 되죠?” 묻는 손님의 물음에 “되지”하고 메모지를 내준다. 얼마 전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엄친아 참가자가 리메이크해 불러 화제가 된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가 신청된다. 다양한 연령대의 기호가 적절히 조화된 선곡이었다.
“내 조그만 공간 속에 추억만 쌓이고, 까닭 모를 눈물만이 아른거리네”
적절한 선곡이라 생각하는데 문득 뜬금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이 많은 앨범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앨범이 있으세요?” 그는 엷은 미소를 띈 채 “나는 음악을 두루두루 좋아한다. 음악이란게 너무 무궁무진해서 좋은 음악이 너무 많다. 어린아이한테 너 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으면 ‘짜장면’이라고 답한다. 그건 그 아이가 짜장면밖에 안 먹어봤기 때문이다. 세상엔 그보다 더 많은 진수성찬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느 것 하나 고르는게 힘들어질 거다. 그거랑 똑같다. 수만 가지 최고 앨범을 가져다 두고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그걸 어떻게 고를 수 있겠나”하고 대답했다. 우문에 현답이라 생각하며 맥주잔을 들었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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