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새누리당 일색 대구서 1/12 몫을 챙겨내는 것”

장태수 대구 서구의회 부의장을 만나다

너도나도 진보정치의 위기를 말한다. 누구도 위기를 부인하지 않는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처음 원내에 진출하며 10석을 차지했을 때의 영광을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보다 원내에 진출한 진보정당 국회의원 수는 늘어났다(진보정의당 7명, 통합진보당 6명). 하지만 여전히 진보정치는 위기다.

어쩌면 위기의 징후는 이미 2004년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이었던 목수정 씨는 자신의 책에서 “17대 국회 초기, 고3 교실처럼 빼곡히 차던 기자실에는 점점 사람이 줄어들어 서너명이 보일까 말까 했다. 떠나간 기자들의 숫자는 떠나간 국민들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불과 서너달 만에 밀물처럼 다가왔던 기대와 관심은 썰물처럼 사라졌다”고 소회한 바 있다. 잠수함의 토끼처럼 기자들이 떠나갔을 때 위기는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진보정치를 이야기하고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은 존재한다. 80.1%의 압도적 지지로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든 대구에도 마찬가지다. 장태수 대구 서구의회 부의장(사진, 진보신당)은 진보정당 당적을 가진 이로써는 유일하게 대구 기초의회에서 재선(2002, 2010년)에 성공했다. 그는 “새누리당 일색의 대구에서 그나마 1/12의 몫을 챙겨내는 것”이라며 진보정당 소속 의원으로서 역할을 규정했다.

서른 살 젊은 ‘동네 어른’
“채신머리없게 자전거 타고 다닌다고…”

▲2013년 단골 식당에서 만난 장태수 대구 서구의원.
▲2013년 단골 식당에서 만난 장태수 대구 서구의원. (사진=뉴스민)

장태수 부의장은 2002년 만 서른의 나이에 의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스스로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선거에 나섰다”고 할 정도로 선거에 크게 기대를 걸진 않았다. 무소속은 돼도 야당은 안 되는 곳이 대구였다. 그런 곳에서 서른 살 민주노동당 당직자가 당선을 바라는건 어쩌면 욕심인지도 몰랐다.

운이 따랐다. 후보 기호 1번을 배정받았다. 2002년 지방선거까지는 기초의원 선거에 정당공천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추첨으로 기호가 배정됐다. 정당공천이 시행되었다면 기호 1번은 당시 다수당이었던 한나라당 후보에게 돌아갔을 것이었다.

“1번 프리미엄이 없었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동네 선거다 보니 주민들은 누가 한나라당이고 내가 어느 당에 속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또 상대 후보가 나를 겨냥해 ‘서구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과 ‘과격한 학생운동권 출신 민주노동당’이라고 비판했으니까 프리미엄 때문에 당선됐다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그가 출마한 서구 비산동(2, 3동)은 오래전부터 염색공단, 3공단, 서대구공단 같은 인접한 공단지역 영세업체에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이 밀집해 살던 동네였다. 때문에 80년 후반부터 진보정당 운동에 뜻있던 이들이 오랫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다. 오랜 운동의 역사는 그가 단지 ‘1번 프리미엄’으로 당선되었다고 볼 수 없는 탄탄한 근거를 만들어준다. 더군다나 3,408표, 60.6%. 그해 서구의회에 입성한 17명의 구의원 중 그는 세 번째로 많은 표와 두 번째로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더불어 그는 서구의회에서 가장 젊은 의원이 되었다.

초기 의정활동 동안 젊은 기초의원이 부딪힌 벽은 노회한 지역 토호로 꾸려진 16명의 다른 의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동네 어른’을 처음 접하는 주민의 반응이 가장 먼저 찾아온 벽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마주치는 주민에게 인사를 할라치면 하나같이 “동네 어른이 옷차림이 그게 뭐냐”고 지청구를 주었다. 한번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탄 주민에게 인사를 했는데 나이 지긋한 주민에게 “의원이 채신머리없게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세대 차이에서 오는 문화 차이였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나 이재오 전 특임장관이 소탈하게 자전거 타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도 했고(웃음), 재작년부터 자전거 대신 자가용을 타고 다녀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일도 줄었다”

비행청소년(?), 1991년을 맞이하다
“어렸을 적, 너무 가난해서 자가용을 가지게 될 거라 생각 못했다”

장 부의장이 자전거 대신 개인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게 된 지는 1년 6개월 정도 된다. 그는 “어렸을 적에는 너무 가난해서 내가 자가용을 가지게 될 거라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대구 남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위로 다섯 명의 누나가 있는 집안의 귀한 아들로 태어났다. 아래로 여동생까지 모두 7남매, 부모님, 그리고 할머니까지 열 식구는 방 둘에 부엌 딸린 담장 없는 집에서 살았다.

“담장이 없는 집에서 살았다. 담장이 없으니 대문이란 것도 없었고, 현관문도 없었다. 벽면에 나 있는 문을 열면 바로 방이었다. 방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훤히 보였고, 사람들도 방안에서 뭘 하는지 다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은 벽돌공장을 운영하다 정리하고, 성당시장에서 채소 행상을 했다. 그가 5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방학이면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수성못 일대 채소밭에서 배추며, 무 같은 작물을 짐자전거에 가득 싣고 성당시장까지 운반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먼저 도착해 자리잡고 있으면 어머니는 손수레 가득 채소를 싣고 아들을 찾아왔다.

“저녁에 장을 걷을 때 남은 채소를 리어카(손수레)에 싣고 자전거 뒤에 리어카를 묶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내가 당시에는 공부도 좀 해서(웃음), 반장이기도 했는데 그땐 해질녘까지 동네에서 친구들이 ‘오징어’니, ‘땅따먹기’니, ‘자치기’니 하면서 놀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게 창피해서 ‘우리집은 왜 이렇게 못 사는걸까’ 고민하기도 했다. 어머니고, 아버지고 두 분 다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한게 이해되지 않았다”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그가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우등생일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두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기도 했다. 그 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춘기 청소년은 점점 공부를 멀리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마시는 술 양이 늘어날수록 석차도 늘어났다. 서울대반에서 연고대반으로 강등(?)되어도 당구장에서 먹는 짜장면은 맛있었다. “1학년말에 담임 선생님이 불러서 뭐가 문제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때 선생님 앞에서 욕을 하면서 ‘공부 안하겠다’고 말했다. 죽을 만큼 맞고, 그때부터 야자시간은 밖에 나가서 술 먹고 당구 치는 시간이 됐다”

어쩌면 그가 대학 진학 후 운동권이 된 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하는 부모님. 떠날 줄 모르는 가난. 그런 사회에 대한 반감. 그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주는 ‘선배’가 등장하고, 그 선배가 술을 사주기 시작하면 일사천리다.

더군다나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91년은 명지대생 강경대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고, 노태우 정권에 항거하는 분신이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의문사했던 때도 이때였다.

“91년과 올해가 비슷한 점이 있긴 하다. 반노동자 정책을 일관하는 정권과 노동자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본의 타살… 하지만 당시에는 조직적 투쟁이 가능했고 그 와중에 정권과 자본의 직접적인 폭력에 타살되었다면 지금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개인적 결기가 죽음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결기와 죽음을 조직적인 싸움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실천으로 함께 보듬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슬프고 우울한 상황이다”

91년과 닮은 2013년, 기초의원 장태수
“1/12, 내 몫을 지켜내는 일이 중요해”

올해는 박근혜 정부가 시작하는 해이자 기초의원으로서 그의 임기가 마무리되는 해다. 내년 6월에 지방선거가 있는 걸 고려하면 사실상 올해가 의원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해다.

그는 그간의 의원 활동을 “12명 중 11명이 새누리당인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아닌 1/12의 목소리를 지켜내는 것이 일이었다”며 “어차피 정치는 100%가 안된다. 타협하고 양보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게 최종적으로 손드는 다수의 뜻에 따라 정해지는 제도 아닌가. 그 속에서 내 몫을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서구청은 환경미화원을 11개월 기간제로 고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더불어 일부 환경 업무를 민간위탁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2011년에 한번 그랬다가 제가 ‘이것만은 절대 안된다’고 해서 막았는데 또 다시 같은 계획을 세운 거였다. 집행부가 그 계획을 가져오면서 ‘이번만큼은 의원님 뜻대로 안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는 지난해 12월 서구청 행정사무감사 과정에서 청소대행업체 부실감독 의혹을 폭로했다. 더불어 서구청의 전반적인 환경미화 정책을 지적했다. 그렇게 장 부의장은 서구청이 환경미화원을 11개월 기간제로 고용하려는 계획을 무산시켰다. 하지만 민간위탁 문제는 막아내지 못했다.

“민간위탁까지 막아내지 못한건 아쉽지만 그래도 기간제 전환은 막았고, 올 3월 이내에 정규직으로 10명이상 신규채용 하겠다는 서구청장 약속도 받았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기초의원의 역할이고, 때문에 기초의회 공간에도 진보정당 의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그 몫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다”

“박근혜 정부가 진심으로 성공하길 바래”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박근혜 정부에 바라는 것을 물었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가 성공해야 야당이나 진보정당이 더 나은 정치를 가져올 수 있다. 실패한다면 다음 선거에서 야당이나 진보정당은 그 실패만 물고 늘어져도 정권을 가져올 수 있다. 결국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갈 뿐이고, 더불어 한국 정치의 퇴보만 되풀이될 뿐이다. 저는 그 안에서 이 정부 들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보살핌 받지 못할 것이란 우려를 줄이고 없애는 역할을 해나가도록 하겠다”

12명 중 11명의 새누리당 의원과 1명의 진보신당 의원. 1/12의 몫. 역할. 따위의 말들이 인터뷰를 마친 후 머릿속을 맴돌았다. 진보정당의 위기론이 팽배한 현 시점에서 장태수 부의장은 그 속에서 절망을 읽어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역할과 희망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기사 초입에 했던 이야기를 조금은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무리는 그것을 수정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너도나도 진보정치의 위기를 말한다. 누구도 위기를 부인하지 않는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처음 원내에 진출하며 10석을 차지했을 때의 영광을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보다 원내에 진출한 진보정당 국회의원 수는 늘어났다(진보정의당 7명, 통합진보당 6명).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대구는 새누리당 일색이란 점은 변함없다. 그리고 “새빨간” 대구에서도 자기 몫의 삶을 지켜낸 사람이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망은 꺼지지 않는 촛불 하나에서 시작된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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