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홍철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을 만나다
“요즘에는 시를 못 쓴다. 늘 쓴다고 생각하고 펜과 수첩은 가지고 다니지만…. 조금 슬프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시인의 정신과 정치인 정신이 같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함축하고, 시적 상징과 비유, 알레고리로 이해해서는 정치를 할 순 없고, 해서도 안된다. 저로서는 대단히 불행하고 아쉬운 일이지만 두 가지를 다 가지진 못할 것 같다. 물론, 꼭 좋은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에 늘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은 있겠지만, 쉽진 않을 것 같다”
그를 수식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지난해 시집을 출간한 시인, 석유시대 이후의 새로운 삶과 교육, 정치를 연구하는 하이하버연구소 소장, 생태모임 땅과 자유 운영위원, 환경과 생태의 가치를 일깨운 인문잡지 <녹색평론> 전 편집장, 청소년 인문학 모임 강사, 그리고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많은 수식어처럼 지금까지 다방면에서 다양한 일을 해온 그가 올해 들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려 하고 있다. 20년 넘게 써온 시도 포기하며 늦깎이 정치지망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변홍철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사진)을 만났다.
다양한 수식어, 하나의 소실점
“녹색당이 해야 할 우애의 정치”
사실, 변홍철 위원장은 지금껏 굉장히 다양한 활동을 해왔지만 그 활동은 언제나 하나로 귀결됐다. <녹색평론> 11년을 지나 생태모임 땅과 자유, 석유시대 이후를 고민하는 연구소, 청소년 인문학 모임 등 늘 환경과 생태, 청소년, 그리고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미래 세대까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와 함께했다.
단지, 지금까지의 그가 그들과 ‘함께 사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번에 만난 그는 함께 사는 것에서 나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책임감의 실체를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말을 빌려 “우애의 정치다. 현실 정치에서 표는 되지 않지만 눈앞의 이익을 넘어서서 목소리가 없고, 얼굴이 없는 존재를 대변하는 것이 녹색당이 해야 할 우애의 정치”라고 설명했다.
사는 것과 대변하는 것의 틈바구니에는 커다란 사고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2011년 이웃나라 일본에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다. 이웃나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세계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다섯 번째로 많은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렸고, 이는 녹색당 창당이라는 정치적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녹색당 창당의 가장 큰 계기는 후쿠시마 사고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테이블에서 한번도 핵발전의 위험성이 정치의제화 된 적이 없다. 후쿠시마 사고에서 보듯 핵발전은 우리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를 정치가 다뤄야 한다. 정치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녹색당을 만드는 가장 큰 계기가 됐다”
그 또한 후쿠시마 사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지난해 발간한 시집 제목이 <어린왕자, 후쿠시마 이후>였을까. 그는 같은 제목의 시를 통해서 후쿠시마 사고로 희생된 어린 생명을 향한 연민과 아픔을 표현했다. 후쿠시마 사고에서 녹색당 창당, 2012년 총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초등학생 아들, 딸에게 큰절한 아나키스트 아버지
“나는 아나키스튼데 무슨 선거고 출마냐”
그는 스스로 표현하는 것처럼 ‘아나키스트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민주노동당에 당원으로 몸담으면서도 그저 기성 보수 양당 정치 구조에서 다원성이 유지되기 위해서 진보정당이 성장해야 한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는 주변 지인들의 출마권유를 웃음으로 거절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나는 아나키스튼데 무슨 선거고 출마냐.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모습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서 “학교 같은 건 다니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들에게 충고하는 아나키스트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를 떠오르게 한다. 2006년 5월 5일 어린이날의 일이다. 이날 새벽 그는 곤히 잠든 아들과 딸을 깨워 큰절을 올렸다. 아들이 12살, 딸이 9살이던 해였다.
그는 이날 경기도 평택 대추리에서 예정된 미군기지 이전 반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며 어쩌면 이 길로 아들과 딸을 오랫동안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땐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날 대추리로 행진하는 민간인을 군인들이 막아서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보다 하루 앞선 4일, 대추리에서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릴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군경은 미군기지 확장 이전을 반대하며 대추리에 남아있던 주민, 학생 및 시민단체 회원들을 진압했다. 투입된 병력만 경찰 1만 3,000여명, 군인 2,800명이었고, 육군 블랙호크 헬기 10여대도 투입된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어린이날인데 놀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두 가지 이유로 절을 한다. 첫째, 아빠가 생각할 때 한국이란 나라가 너희에게 물려주기엔 너무 부끄러운 나라다. 미안하다는 의미로 절을 한다. 둘째,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빠와 평등한 관계로 고민을 해주기를 바란다. 아빠 혼자 감당을 못하겠다. 아빠와 동지적 관계에서 고민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절을 한다’ 뭐, 그런 거창한 말을 하면서 절을 했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그 마음을 철회한적 없이 살아왔다. 그때부터 얘들한테 아빠는 어른이긴 하지만 동료고, 같이 고민하는 사람이란 인상을 주게 된 것 같다”
이렇게만 보면 그는 분명히 변했다. 함께 사는 것과 대변하는 것의 차이만큼 그는 변했다. 하지만 반평생을 그와 함께 살아온 부인 오은지 한티재 대표는 남편의 변화가 불안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당 활동을 한다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녹색당의 가치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선거에 대해 고민하는 걸 봤을 때도 그것까지 해야 하나 의문은 있었지만, ‘사람 변홍철’은 크게 변했다는 생각은 안했다. 내가 19살 때부터 봐온 남편은 그냥 자기가 ‘옳다’, ‘바르다’ 생각하는 건 그대로 실천하는 선배였다. 그런 사람이니까 당 활동에서도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피하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면에서는 변함없는 일관된 사람이다” 오 대표의 말은 앞선 그의 다양한 경력들이 어떤 일관됨으로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귀결됐음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소실점의 시작, <녹색평론> 23년의 역사
소련 붕괴, 사상의 혼란기…<녹색평론> 만나 다른 길 찾아
그 소실점은 <녹색평론>으로부터 시작된다. 현재 그의 사무실이자 한티재의 사무실이기도 한 공간은 1991년 11월 <녹색평론>이 첫발을 뗀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 새 단장을 했다는 사무실 한켠에는 <녹색평론>의 창간호부터 최근호까지 23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23년의 역사는 지금의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91년 군 복무 중이던 그는 휴가기간에 우연히 <녹색평론> 창간호를 구입하고, 정기구독 신청을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뭇 젊은이들의 이상향이었던 소련이 무너졌고, 많은 젊은이들이 사상적 혼란기를 겪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우연하게 만난 <녹색평론> 덕분에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
“휴가 중에 우연히 창간호를 보고 번쩍했다. 대다수 우리 세대들이 사상적 갈등을 겪을 때 <녹색평론>을 만나는 덕분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또 다른 길을 찾게 됐다. 전향의 개념도 아니였고, 내가 생각하는 운동과 정치의 자연스러운 확장이었다”
<녹색평론>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배가 운영하는 대안 교육 전문 출판사에서 일하던 중 <불광>이라는 불교잡지에 귀농을 하려다 미룬 사연을 소개한 글을 실었다. 그 글을 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그에게 함께 일해 볼 것을 권유했다. 그 길로 그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내려왔다.
“귀농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김종철 선생님이 던지 미끼가 ‘우리가 책만 만들려고 하는건 아니다. 작은 농장도 만들어서 젊은 사람들과 교육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좋은 기회다 생각하고 내려왔는데 웬걸, 선임자 도망치고 그렇게 책 만드는 일을 11년 동안 하게 됐다”
관념의 현실화, ‘땅과 자유’ 결성
“<녹색평론>의 인문학적 언어를 운동의 언어, 정치의 언어로”
어쩌면 <녹색평론>을 만나기 이전부터 그에겐 생태주의적 세계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 대표는 그가 결혼할 때부터 귀농을 꿈꿔왔다고 말했고, <녹색평론>도 ‘농장’ 때문에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의 자신을 “다분히 관념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초기 <녹색평론>도 철학적, 윤리적, 인문학적 관점으로 녹색담론에 접근했고,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관념적이었다는 그의 사상은 2003년, 땅과 자유를 만들면서 좀 더 구체적인 현실의 영역,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땅과 자유를 만들게 된 계기가 녹색평론의 인문학적 언어를 운동의 언어, 정치의 언어로 번역해서 현실정치로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후 그의 삶은 굉장히 구체적인 운동의 현장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2005년 쌀 개방 반대-우리쌀 지키기 운동, 2006년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등 이 시기 그는 ‘정치(대변하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실천 현장에서의 ‘운동(함께 사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운동의 한계는 명확했다. 신념을 지키는 소수의 운동은 현실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는 소수의 신념과 가치도 의미는 있지만 이것이 결국 소수의 자기만족적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하나의 ‘엘리트주의’에 머물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하게 됐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일면 타당하게도 생태주의, 친환경은 먹고 살만한 386세대의 호사쯤으로 치부되는 일도 잦았다.
이 같은 고민은 당연하게도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됐다. 때문에 녹색당 창당 과정에 그가 참여하게 된 것도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었다. “이게 뭘까 생각했다. 아무리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340조라는 국가적 재정이 잘못 사용되면 우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풀뿌리도, 땅도, 공동체도 다 무너졌다. 이런 구조를 바로 잡지 않고서 우리 신념만 가지고 있는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이 필요하구나. 국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소실점, 녹색당…녹색공화국
요즘 그는 대한민국 헌법을 자주 들여다본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장 1조의 의미를 되새기게 됐다고도 했다. “김상봉 교수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공화국은 한마디로 하면 모두의 나라다’라고, 힘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수도권 사람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나라라는 거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공화국이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면 제대로된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
‘녹색공화국’. 그가 생각하는 녹색당이 추구해야할 국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기존의 진보정당이 아닌 녹색당을 소실점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국가 권력을 잡는 경쟁에 참여하고 권력을 획득해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 정당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기존의 진보정당이 진보의 ‘가치’는 있지만 지향하는 국가의 모습은 없다고 평가했다.
“보수 거대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정당도 이념과 진영논리에 치우쳐서 가치가 실현된 국가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적 차원에서 상황 인식이 허술하고 취약하다. 진짜 리얼리스트다운 진정한 리얼리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녹색당의 정치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정한 리얼리즘에 입각해야 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녹색공화국 정도가 될 것이다”
대화를 글로 옮긴이의 조바심으로 덧붙이면, 6시간. 그와 대화를 나눈 시간이다.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이 시간 동안 인간 변홍철이 어떤 사람인지 100% 알게 됐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단지 대화를 나눈 사람으로서의 느낌과 그의 증언을 토대로 미루어 그를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인터뷰 동안 그는 ‘분명한’ 단어로 녹색당이 경쟁의 장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보다 더 ‘신중한’ 단어로 이제 첫발을 내딛는 녹색당과 자신에게 많은 대화와 토론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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