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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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 <아울러>와 녹색당 재창당 준비하고 있는 그를 만나다
비가 왔다. 술을 어떤 걸로 하겠느냐는 물음에, “막걸리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막걸리에 빈대떡을 안주삼아 이형석(27) 씨를 만났다. 지난해 경북대학교 사회대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학생회실에 ‘우만공(우리들이 만드는 공간)’이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단대 학생들과의 소통 공간을 만들고, 대안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공정무역 커피를 내려주는 일도 직접 했다. 1년이 지나 그는 사회적 기업 <아울러>의 창업자이자, 녹색당 대구시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아울러>와 녹색당, 그 사이
‘우만공’을 만들었을 때도 알 수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주류와는 다른 삶, 대안적인 삶을 갈망하고 있었다. 올해 초 시작하게 된 <아울러>도 그런 삶의 모델을 찾는 일환이었다. <아울러>는 2000년 덴마크에서 처음 시작된 신개념 도서관 ‘사람 도서관’을 기업화 해낸 것이다. 책 대신 사람을 빌려주는 ‘사람 도서관’은 ‘책’과 ‘독자’간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서 각자가 경험하지 못한 삶의 이야기를 살아있는 언어로 공유하는 방식을 띈다.
형석 씨는 <아울러>를 통해서 소통과 변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사람 도서관이라는게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소통을 하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죠. 변화를 우리가 만드는 건 힘들 수 있지만 변화할 수 있는 멍석은 깔아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다니던 학교도 접어두고 <아울러>를 만드는데 집중 하던 그는 ‘사람책’으로 만났던 박종하 녹색당 운영위원으로부터 녹색당 창당에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에 사회적 기업 준비하면서 이래저래 많이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어요. 돈 문제, 행정 문제, 기관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사람들을 못 올라오게 막고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그때 <닥치고 정치> 같은 책이 많이 각광 받았는데 그런 책들을 보면서 내가 해도 이들보다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박종하 선생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였죠. 막상 해보니까 생각보다 서러운 일도 많고, 어려운 일도 많더라구요”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직은 “제비뽑기로 하게 된 것”이라며 웃었다. “젊은 사람이 하기를 원하는 분위기 였어요. 김영숙 선생님과 공동운영위원장을 하게 됐죠. 이번에 선거 치루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로컬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뜻을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구요”
그는 기층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카페 ‘우만공’도 그래서 만든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정당 운동과 기층의 괴리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층이라는 부분은 전혀 변함이 없어요. 녹색당이 지향하는 풀뿌리 정치, 로컬, 지역과 일상을 위한 정당이라는 모토가 좋았어요. 결정적으로 마음을 끌었던 부분은 구의원을 많이 배출하면 기저에서부터 지역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어요. 구의원 한 사람이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5억원 정도 된다는데, 그 돈이면 3, 4명의 지역 활동가들을 마음먹고 지원할 수 있다는 거죠. 대구에서 그 정도 숫자면 충분히 판을 다시 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2년 후 치러질 지방선거를 바라보고 있다. 본인이 출마를 하든 지역에서 당선 가능성이 있는 다른 후보의 운동을 돕든 어떤 식으로든 지방선거를 치러낼 생각이다. 몇몇 지인들은 그의 출마를 권유하기도 한다. 바위에 작은 계란 하나 던지는 일이 될지라도 깨져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조언들이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어져서 익게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도 듣는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실한 입장을 정하지는 않았다. 대구 지역 청년들이 나서서 대구를 변화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천천히, 많이 고민해서 만들어나갈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가난한 사람은 본인이 노력하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삶의 방식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부산에서 자란 그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표현대로 “부모님 말 잘 듣는 척 하는 모범생”으로 고등학교를 마쳤다. ‘잘 듣는 척 하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 앞 책방에서 하루 7, 8권의 판타지 소설과 만화책을 빌려 읽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졸업 후 부산 동아대 인문학부 1학년을 다니던 중 자퇴했고, 재수를 준비했다. 성적이 꽤 올랐다. 대학 지원에 욕심을 부렸다. 다시 시험을 준비했고, 2006년, 경북대 사회복지학과에 들어왔다. 그때까지의 그는 본인이 생각해도 “굉장히 싫은 사람”이었다.
“집이 좀 살았거든요. 생각이 지금이랑 완전히 달랐어요. 돈이 없거나 못 사는 사람은 능력 없고,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런거다고 생각했고, 돈 없는 사람 보면 무시하고 그랬어요. 내가 매번 사주고, 보태주고 하면서 우월감 느끼고 그랬거든요. 그때 사회복지학과를 생각한건 ‘영리재단, 사회복지재단을 하나 만들자, 만들어서 돈 내는 만큼 복지를 누리게 해주자’는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그가 집을 떠난 순간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하우스 푸어인거죠. 아버지께서 해운대쪽에 타워팰리스 비슷한 걸 샀는데 그게 그때부터 가격은 떨어지고 팔리지도 않는거예요. 완전히 망한거죠”
이후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학교를 다니는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내 삶은 하나도 나아지는게 없나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건 그때서야 알게 된거죠”
입대를 한 그는 군대에서부터 변화를 주도했다. “후임들을 풀어줬어요. 위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신경안쓰고. 저 때부터 구타는 없었거든요. 선임들이 뭐라고 하는건 듣고 넘겨버리고 후임들을 풀어줘버렸죠. 후임들이랑 편하게 지내고 싶었거든요”
제대 후, 과학생회장과 단대학생회장을 거치면서 그는 변화와 대안적인 삶의 형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현재까지는 <아울러>와 녹색당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전히 고민은 많다. 아직 졸업하지 못하고 한 학기를 남겨둔 학교 문제도 걸리고, 당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부딪힌다. “일 적인 부분이나, 가치관하고 부딪히는 경우가 잦아요. 아무리 녹색당이 반정당의 정당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정당이잖아요. 작은 구의원이라도 그건 집권이고, 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는거죠. 이것들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풀뿌리 조직과 일상이 결합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저는 내공이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이론적인 부분, 철학적인 부분, 기술적인 부분에서 많이 공부해야죠. 지금은 눈에 보이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이 불확실, 단 하나 분명한 건…
현재로선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아울러>가 자리 잡고, 출자까지 가능해지면 사람책 카페도 만들고, 나아가 관련된 책도 출판하고 싶다는 그의 계획이 실현 될지. 재창단 절차를 밟고 있는 녹색당에서 다시 운영위원장을 맡게 되거나, 지방선거에 출마하게 될지.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미지수다. 한 가지 분명한건 그가 지금 현재에서 머물러 있지는 않을 거란 사실이다. 앞으로의 결과가 기대되는 이유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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