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 “권력보다 마누라가 무서운 목사님”

백창욱 대구 평통사 대표를 만나다

“체포적부심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풀려났다. 다행이다. 대구가는데 지장없게 됐다. 나는 권력보다 마누라가 더 무섭다”

지난 4월24일, 대구 평통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대표인 백창욱(50) 목사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가 본격화 되면서 그는 수차례 강정마을로 향했다. 크지 않은 체구에 언제나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지만 강정마을에서 만큼은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처럼 공권력과 싸우며 벌써 두차례나 연행을 당했다. 투쟁현장에서 연행을 당한 건 강정마을에서가 처음이라는 그는 “싸우는게 좋은 거다. 공권력과 싸우면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공고 졸업, 해고, 신학대학 진학, 자퇴…
광주항쟁 전모 알리는 대자보 읽고, 삶이 변하기 시작

▲ 2012년 백창욱 목사(사진=뉴스민)
▲ 2012년 백창욱 목사(사진=뉴스민)

그가 ‘마누라’를 권력보다 무서워하는 이유는 어찌보면 무리하다고 볼 수 있는 자신의 선택들을 묵묵히 믿고 따라와주었기 때문이다. 애초 대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가 개척교회를 세우기 위해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갈 결정을 할 때도 가족은 그의 선택을 믿고 따라왔다. 또 십수년을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온 그가 뒤늦게 목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준 것도 그의 아내였다. 여러모로 그는 “권력보다 마누라를 더 무서워”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시절 그리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서울의 한 공고를 나와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정리해고 바람이 불어서 해고를 당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자신을 해고시켜준 회사가 고마웠다. 체구도 외소하고 손 기술도 별로 없는 그에게 힘든 노동현장은 맞지 않는 곳이었다. 하루하루가 고민의 연속이었는데 회사가 알아서 결정을 내려준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다닌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하는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남들 졸면서 듣는 설교를 필기까지 하면서 들었다.

“내가 뭐 하나에 꽂히면 완전 몰입을 하는 스타일이거든. 사람들마다 재능이나 관심이 각기 있잖아. 음악 좋아하는 사람, 사교에 관심 많은 사람, 나는 뭐에 관심이 있었냐 하면은 성경에 관심이 많았어. 설교가 그 성경을 풀이해주는 말씀이니까 필기까지 하면서 들은거지. 신약전서를 많이 읽었는데 예수님의 일생에 굉장히 동화가 됐어. 특히 수난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 당한 후에 되살아나는 과정이 감명 깊었어”

그런 그였기에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입시준비를 해서 총신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1982년의 일이다.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신학대학을 다니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목사가 되었다면 오늘의 그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또 오늘의 아내와 함께 하고 있었을지도 알 수 없다.

군 제대를 하고 나 온 1984년 9월, 그는 학교 게시판에 붙은 십수장의 대자보를 읽게 되었다. 80년 광주항쟁의 전말을 알리는 대자보였다. 한 시간이 넘게 자보를 다 읽은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때 처음 안거야. 80년 5월의 사건을 84년 9월에 처음 안거야. 이런 엄청난 사실을 나는 그때야 안거지. 부끄러움이 엄습을 했어요. 거기서 자연발생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이어졌지. 내가 몸담고 있는 환경이 문제가 있구나. 아무도 나한테 이런걸 가르쳐주지 않았거든. 선배든, 교사든, 교회에서든.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 모범 청년이었거든, 교회가 가르쳐줬는데 딴 짓 하다가 못들은 경우는 없어.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나도 안해준거야”

그리고 그는 도서관에 들어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주로 기독교의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했다. “그 시절에는 동아리 같은데서 체계적으로 학습을 받았는데, 나는 동아리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냥 혼자 공부를 시작했지” 그렇게 반년을 도서관에서 살다가 나온 그는 학교를 그만뒀다.

“12월 초, 지금도 그 느낌이 선연해. 도서관 문을 딱 나서는데 찬바람이 촤악 오면서 내가 바뀌었다는 자의식이 생기더라고, 의식의 전환이 온거야. 사상의 전환이 왔어. 스스로 의식화가 된거지. 그러면서 내가 처한 위치, 그전엔 내게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 교회가 객관적으로 보이고 어떤 역사 흐름 속에 한 지점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됐지”

그렇게 그는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완구업체에 취업해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해서 아들과 딸 하나씩 낳고 사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러던 중 또 하나의 사건을 겪었다.

서른 넷, 다시 목회의 길로

“96년이야. 기본적으로 직업은 마음이 안들었어. 가족이랑 근근이 먹고 살면서 직업이 보람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해서 인생에 대한 회의가 굉장히 컸어. 그때 교회에서 성경일독하기 프로그램을 진행했거든. 회사 마치면 술도 안 마시고 일찍 도서관 가서 열심히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신학교 다닐 때 정서가 되살아난거야. 내가 이걸 읽고 있을 때 행복했다는 걸 알게 된거지. 그리고는 이게 나를 목구멍까지 압박을 하는거야. 너 다시 그 길을 가야한다 하면서 목까지 찼어. 이걸 회피하면 내가 죽을 것 같은 압박이 나를 엄습했지”

백 목사는 이 대목에 이르러 눈물을 보였다. 당시에 겪었던 두려움과 고민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목사의 길로 들어섰다.

“아내가 총신대 유아교육과 였는데, 그 과에 들어오는 여학생들 꿈이 사모인 사람이 많았어. 그래서 신학과 학생들이랑 짝도 많이 됐고. 그런데 우리 마누라는 그런 과 풍속이 질색이었거든. 그래서 신학과도 그만둔 나랑 만나서 결혼을 한거지. 아, 이 사람은 목사는 안하겠구나 싶어서. 그런데 그럴 줄 알았던 사람이 그렇게 힘들어하니까 인정을 해줬지”

2005년, 돌고 돌아서 그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후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정평)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2006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구로 내려갈 결정을 하게 됐다. 목정평 일을 그만둔 후 진로를 모색 중이던 그는 동료 목회자의 권유로 기도원에 들어가 하늘의 뜻을 구했다. 당시 그는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계속 할지 아니면 대형 교회에 들어가서 목회를 배울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종교인은 자기 인생에 중요한 기로에 서면 하늘의 뜻을 찾거든.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는다고 해. 내 생리와는 잘 맞지 않는데, 생활 속에서 환경의 인도를 받아서 가는게 내 타입인데, 서울에서 가깝게 지내던 목회자가 충고를 해서 그렇게 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

‘뚝’ 떨어진 지시… 개척을 해라. 대구로 가.

고민하고 있던 둘 중 어느 것으로 선택할지를 두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뜻밖의 ‘지시’를 받았다.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말문이 안 열리는거야. 보통 기도의 문이 열린다고 하는데, 마음이 안 열리고 아무 감동이 없어, 그냥 끙끙거리면서 시간이 흘렀어. 10여분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지시가 떨어졌어. 이렇게 말하는 게 조심스럽긴 한데,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위에서 지시가 ‘뚝’ 떨어졌어. 그게 뭐냐면 개척을 하라는 거였어. 그게 원래 내 마음에 있는 거라면 나한테서 우러나온 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거든 나는 그런 마음이 0%였어. 0. 개척이 안되거든. 누가 요즘 개척을 해. 자본의 논리랑 똑같아서, 대형교회가 다 흡수해버리잖아. 그런 현실을 알기 때문에 개척은 언감생심이었지. 그런데 개척을 하라는 지시가 뚝 떨어졌어. 그러니까 갑자기 폭포수가 터지듯 내 입이 막 열렸어. 뜻하지 않는 내용이여서 거기에 대한 격한 반발이 좀 많았던 것 같아. 지시 내용이 내가 도저히 생각지 않은 거라서 그거에 대한 격한 반발이 반응이 된 것 같아. 거역을 할 수 없었던게 기본적으로 하나님 뜻을 보여주세요, 알려주세요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거 아냐, 그리고 그 뜻이 온거 아냐 그걸 내가 거부를 할 수 없는거야”

다음 날,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서 그는 다시 기도를 했고, 전날과 똑같이 대구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떤 연고도 없는 척토였다. 격렬하게 거부하며 기도를 했으나, 이 또한 거역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2007년 2월 대구로 내려왔다. 논공에서 대구새민족교회를 열었다.

힘들었다. 어떤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개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내와 단둘이 예배를 보는 일도 많았다. 대형교회가 즐비한 상황에서 작고 보잘 것 없는 개척교회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 년 동안 교회가 자리를 잡는데 정신없이 매달렸다. 1년쯤 지나자 다른 곳에도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대구 애활원 사건이었다. 2008년, 대구판 도가니 사건이있었다. 아동복지시설인 애활원에서 원장이 아동을 성폭행하고 학대한 사실이 드러났다.

어떤 일이든 한번 꽂히면 몰입하는 성격답게 완전히 몰입하여 열심히 싸웠다. “그때 그 일로 내가 대구에 발붙일 수 있었지” 그때 만난 사람들이 김용철 민중행동 대표,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사무국장 등이다. 대구 평통사는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투쟁에서 만났던 평통사에서 요청을 해와서 대구에서 조직하는 작업을 맡게 되었다. 2008년 준비모임을 만들고 2년여 동안 준비한 끝에 2010년에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교회도 지난해 8월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겨와 많진 않지만 매주 신자들이 찾아와서 함께 예배도 보고 성경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 2012년 강정마을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백창욱 목사 (사진=뉴스민)
▲ 2012년 강정마을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백창욱 목사 (사진=뉴스민)

정의와 평화, 평등,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며

“당시에는 그런 건 몰랐는데 통일운동은 자주파 계열이 많이 하고, 평등파는 계급적인 면에 관심이 많잖아. 그래서 애활원 투쟁할 때 평등파 쪽 사람을 많이 알게 된거고. 덕분에 나는 그런거 상관없이 이쪽, 저쪽 사람들이랑 잘 지내. 바라는게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계파에 연연하지 말고 함께 연대해서 싸울 수 있었으면 하는거지”

“강정을 다시 가야하는데, 마누라가 안보내줄려고 하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저 민주시민으로서 정의와 평화, 평등,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덕목을 지키면서 살아가려는 백창욱 목사는 오늘도 핍박받는 약자의 곁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 뉴스민 (http://www.newsmin.co.kr).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