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 앞 둔 이길우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장을 만나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 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22살, 신발공장에서 미싱을 했던 미경이는 자신의 왼쪽 팔뚝에 이렇게 꾹꾹 눌러쓰고, 회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죽음은 살인적인 노동착취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냈고, 같은 또래의 한 청년에게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남선물산 노조 위원장으로, 깃발을 태우기까지…
“남선물산 노조 해산은 아름다웠던 해산…”
1991년 12월, 이길우 대경건설지부장(사진)은 당시 스물넷이었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남선물산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지 9개월째 였다. 그전까지 노조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이 지부장은 ‘장인어른’이라 부르며 따랐던 남선물산 노조 사무국장의 권유로 권미경 열사의 장례투쟁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몇 천 명은 모였던 것 같은데. 회사 앞에서 노제를 지내려고 하는데 회사에서 횟가루 뿌리고, 물 뿌려놓고 사람 앉지도 못하게 했다. 치고 박고 싸우고, 소화기 뿌리고 최루탄 쏘아대고. 열이 확 받았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속담도 있는데 죽은 사람 노제도 이렇게 못 지내게 하나 싶으니까 열이 확 나데”
이보다 한 달 앞선 11월, 역시 사무국장의 이끌림으로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했던 그는 7만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쉬는 날 그렇게 모인 이유가 궁금했던 터였다. 대구로 돌아온 그는 두 달간 있었던 일에서 느꼈던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노동상담소를 찾았다. “가니까 이래저래 학습을 한번 해보라 하더라고” 그렇게 그는 노조 활동에 들어섰다.
애초에 그는 노조활동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에 영 취미가 없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실습생으로 남선물산에 들어왔고, 9만원, 12만원, 15만원.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임금에 혹해서 학교 졸업 후에도 남기로 마음먹었을 뿐인 평범한 사원이었다. 입대 전, 2년을 일하는 동안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성실사원이었다. “2년 동안 내가 만근을 했다. 1년에 만근하는 사람이 두 명 정도 밖에 안 나올때다. 그러니까 회사는 좋아하지”
제대 후 다시 남선물산에 들어가게 된 것도 특유의 성실성 때문이었다. 제대 후 인사차 들린 회사에서 우연히 만난 인사담당자가 그를 알아보고 다시 회사에 나올 것을 제의했다. “월급 얼마 줄건데 하고 물으니까 45만원 준다더라. 군대가기 전에 24만원 받았는데 두배나 오른 거였다. 이거 웬 떡이고 싶었지. 그래 알았다. 내일부터 출근 할게요. 그랬다”
그 특유의 성실성은 노조활동에서도 드러났다. “한번 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답게 노조활동을 시작한 그는 노조가 해산하는 97년까지 4년 동안 위원장을 지냈다. “남선물산 노조의 해산은 아름다운 해산이었다. 지역 노조 불러서 해산 총회까지 한 노조는 거의 없을거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날 그는 직접 디자인하여 만든 노조의 깃발에 불을 놓았다. “의미 있는 깃발이었는데, 보관 할까 하다가 노조원들 보는데서 불태워버렸다” 당시 남선물산의 정리해고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돼 노동법개정총파업 투쟁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사람에 실망 느끼고, 노동 운동에 회의감 느껴…
6년만에 건설노조로 돌아오다
노조 해산 이후 잠시 동안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내 성격에 장사가 되겠나. 이놈의 학생들 새벽 2시쯤 와서 ‘선배님, 뭐 좀 남은거 없습니까’ 하는데 ‘다 가지고 가라’ 그랬다” 장사를 접고 그는 객지를 떠돌며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대구에서는 의도적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노조 활동을 하며 겪었던 노동운동의 회의감이 그를 대구를 떠나게 만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에 대한 실망이 그에게 크게 남아 있었다.
“사람이 좋아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운동 과정에서 믿고 신뢰했던 사람들하고 원수처럼 지내게 되는게… 그래서 운동안하고 싶었다” 운동 정파 간의 알력 싸움으로 인해 그는 절친한 동지들 사이에서 이간을 당하기도 했고, 매도당하기도 했다. 부산과 경기도 등지를 떠돌던 그는 2003년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대구로 돌아와서도 노조 활동을 할 생각은 크게 갖지 않았다.
그해 3월 그가 일하고 있는 현장으로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찾아왔다. “그때가 지금 오상룡 본부장하고 노조 들어갈 땐데, 건설노조서 내 있는 현장으로 찾아오더라, 세 번이나 왔다. 그래서 인자, 그래 뭐 한번 해볼게. 그랬다” 그렇게 건설노조의 삼고초려하는 구애 끝에 그는 다시 한번 노조 활동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당시 건설노조의 운영방식은 그에게 “정말 아니”었다. “운영, 활동 방식이 절차도 없고, 민주주의도 없고. 건설노동자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저그들 마음대로 하더라. 오죽하면 내가 대의원 회의 하는데 위원장을 때렸다. 그러면 안됐는데. 너무 화가나서… 강력한 리더가 필요하다? 건설노조가 아무리 능력이 없고, 실력이 없고, 힘이 없더라도 리더의 강력함은 원칙과 민주주의 절차 속에서 이뤄져야 했거든”
또 다시 운동에 실망을 느낀 그는 2003년 이후 2년 동안 다시 대구를 떠나 있었다. 2005년 12월 그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노조로 돌아왔다. “집사람한테 마지막으로 2년만 딱하고 그만둔다고 이야기했었다. 2년 안에 목수분과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노조활동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의 2006년이 다가왔다.
2006년, 총파업 투쟁의 기억
32일간의 총파업…“합의 반대 했었지만…”
2006년 5월 31일에는 제4회 지방자치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건설노조 내부에서는 참정권 투쟁을 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당을 받으며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에게 투표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은 건설노동자들에게도 투표할 권리를 달라는 취지의 참정권 투쟁을 준비하려 했었다. 이 지부장에게 그 계획은 “정말 말도 안되는 계획”이었다.
“투표하면 뭐하나, 정작 노동자들은 돈 못 받는데, 그 돈 받을 수 있는 투쟁이 가능하면 총파업도 가능하겠다고 그랬다. 그럴꺼면 총파업 하자 그랬다. 아무 실력도 없는 노조원들 데리고 투표하고 일당 받도록 하자고 하는건 총파업이랑 맞먹는 수준의 투쟁이라 생각됐다. 뭐 어쨌든 그래서 총파업 하자고 해서 3월부터 총파업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건설노동자들 사이에서는 IMF 이후 반 토막 난 임금으로 인해 불만이 쌓여가던 중이었다. 이 지부장이 총파업 투쟁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지 두달만에 800여명의 투쟁 대오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건설노동자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6월 1일 총파업에 돌입했지만 내외부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노동쟁의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은 총파업은 외부적으로 ‘불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매도당했다. 경찰은 공안탄압을 시작하고 간부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고 모든 집회를 불허했다. 그로인해 내부적으로는 투쟁의 동력이 위축되어 갔다.
32일간의 총파업 투쟁은 보수언론이 연일 “과격, 폭력, 불법”으로 매도 할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6월 12일 노조 간부들의 구속에 항의하며 이뤄진 수성경찰서 앞 집회, 6월 20일부터 이뤄진 대우트럼프 건설현장 33층 고공농성, 6월 23일 범어네거리 기습 점거로 이어진 총파업 투쟁은 7월 2일 노사합의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솔직히 나는 끝까지 합의를 반대했었다. 2005년 울산플랜트 투쟁처럼 마지막까지 옥쇄투쟁으로 저항하며 단협 체결 못하더라도 산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처음부터 임금 17만원 쟁취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거나 다름없는 합의안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지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었다”
당시 건설노조가 내건 선결조건은 ▲적정임금보장 ▲유보임금(쓰메끼리) 근절 ▲불법 다단계 하도급 근절 ▲4대 사회보험 적용 ▲산업안전보건법 준수 등이었다. 7월 2일 건설노조는 ▲형틀노조원 1만원 임금인상 ▲철근노조원 5천원 임금인상 ▲8시간 노동시간 탄력적 운영 등에 합의하고 길었던 총파업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2년, 다시 총파업을 앞두고
“조합원들과 약속 지킬 때까지”
이길우 지부장은 올해 다시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2006년 투쟁은 노조 차원에서는 상당한 투쟁으로 평가 할 수 있어도, 조합원들에게는 실력없는 투쟁이었다. 17만원 임금 협상 결의하고 11만원에 합의했고, 현장 복귀도 못했다. 올해 투쟁은 좀 더 조직적인 면에 집중할 생각”이라며 이 지부장은 웃어보였다.
이 지부장은 “천 명이 시작해서 천 명이 10원을 받아내는 것과 백 명만 남아서 1,000원을 받아내는 건 의미가 다르다. 이제는 천 명이 남는 투쟁을 할 필요가 있다”며 덧붙여 말했다.
앞으로 3년 동안 그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2006년 총파업 때 내걸었던 일당 17만원을 달성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천 명이 10원을 받아내는 조직을 남기는 것이다.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는 남해의 한적한 섬이나,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
“올해 분위기가 좋다. 조합원과의 약속.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지키고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다. 그리고 지금 400명인 조합원을 천 명으로 만들어낼거다. 천 명이 움직이면 세상은 금방 변할 수 있을거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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