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진보연대 백현국 상임대표를 만나다
올해 2월 16일 대구고등법원은 36년 묵은 실타래 하나를 풀었다. 이날 법원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모진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던 백현국 대경진보연대 대표(사진)를 비롯한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조치 9호는 1975년 5월 13일 발동된 대통령 특별조치로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리영희, 백낙청 필화사건, 김명식, 양성우 필화사건 등 지식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사건들이 이 조치로 발생했다.
“가입시다” “어디요” “가보면 알지”
유서, 고문, 간첩단, 긴급조치 9호
백현국 대표는 그날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76년 6월 12일,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던 중동의 자택에서 출근을 위해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백 대표는 경산 진량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문을 나서자 흔한 시대극의 한 장면처럼 검정색 지프차가 서 있었다. “가입시다” “어디요” “가보면 알지” 그 길로 백 대표는 앞산 중앙정보부 경북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앞산으로 끌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유서를 쓰는 일이었다. 백 대표를 끌고 간 사람들은 불러주는 대로 쓰면 된다며 그에게 유서를 쓰게 했다. “부모님한테 그동안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면목이 없어 먼저 갑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내용이었다” 유서를 쓰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고문이 시작됐다.
처음 사흘 동안은 잠을 한숨도 재우지 않고 볼펜과 백지만 내밀었다. “오늘부터 거꾸로 기억나는 대로 한 일을 쓰라고 하더라. 공백이 생기면 그때부터 ‘평양 다녀온 것 아니냐. 아니면 증명해라’고 매타작이 시작됐다” 눈을 가린 채 시작되는 매타작은 극한의 공포 자체였다.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누르거나, 각목을 다리에 끼워 압박하는 고문은 기본이었다.
3일이 또 지났다. 그러자 그들은 잘 만들어진 도표를 하나 내밀었다. 이미 3년 전에 와해한 홍정회라는 대학서클 조직도였다. 홍정회는 1970년 대학 선후배들과 학습을 통해 지적 측면을 갖추기 위해 결성한 조직이었다. 단순히 세미나나 강연을 계획하고 진행했던 홍정회는 그들에 의해 어마어마한 간첩단이 되어 있었다. “내가 봐도 멋진 조직도더라. 그대로만 할 수 있으면 희한하겠더라”
그들이 걸고 나선 혐의를 백 대표가 부인하자 그들은 백 대표가 집에서 앉는 위치가 북쪽이라거나 붉은색 넥타이를 한 사진 등을 증거라고 내밀며 그를 “골수 빨갱이”라고 몰아세웠다. 이 수사과정에서 그는 삼촌, 외삼촌, 고모 등이 해방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했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는 친일파였다. 삼촌과 외삼촌은 그런 아버지에 반해서 독립운동을 하고 좌익 활동을 했던 것 같은데, 그 모든 것을 수사를 받다가 알게 됐다. 어쩌면 그 피가 나한테도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 대표가 완강히 부인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유인물을 하나 내밀며 “이거 니가 시킨거 맞재”라고 물었다. 그가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관련 유인물이었다. “1년 전에 후배한테 등사를 부탁했던 건데 그걸 들이밀더라고. ‘내가 시킨거 맞다’ 그랬더니, ‘그럼 이거 유신반대 하는거 아니가’ 하더라고, ‘유신반대 합니다’ 그랬지” 그렇게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화원교도소에 수감됐다. 6걸음, 팔을 양쪽으로 뻗으면 벽이 닿는 0.7평 독방에서 2년을 생활했다.
80년 5월, 대구
유신학원 영어강사 ‘백범’
수감생활을 끝내고 교도소 문을 나서던 날 얼굴도 보지 못했던 아들이 모시옷을 입고 아버지를 마중 나왔다. 아들은 총총총 아버지를 향해 뛰어오다 낯선 얼굴에 놀라 뒤돌아섰다. 출소 후에도 정권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복역 중 끊임없는 전향 공작에도 전향서를 쓰지 않았던 그에 대한 보복이었다. 주거제한. 주거지역을 벗어나려면 담당 경찰서 서장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도착한 지역 관할 경찰서에도 보고해야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인데. 나한테 전향서를 쓰라는 말은 나보고 공산주의자가 되라는 말이었으니까”
백 대표의 민족주의자로서 면모는 이후 삶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근무했던 고등학교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그는 1979년도 연말부터 대형 입시학원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사찰을 계속하고 있던 중정은 학원 강사로 일하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이름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백범.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의 호를 따 가명을 만들었다. “지금도 백범 선생 하면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다. 당시에 알게 된 사람들은 지금도 백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년을 백범으로 살았으니까”
그해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다. 박정희가 죽은 뒤 전국적으로 각 지역 대표들이 모이는 대책회의가 구성됐다. 백 대표는 영남지역 대표로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1980년 4월 호남지역 대표였던 故 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이 “2월부터 광주 곳곳에 모래주머니로 벙커가 만들어지고, 미국의 움직임도 수상하다는 정보가 있다. 광주에 큰 사건이 생길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윤한봉 대표가 그렇게 주장을 했지만 당시만 해도 민주화가 다 이뤄졌다는 분위기였다. 큰 의심이 없었다. 그렇게 광주에서 큰일이 터질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5월 26일이었는지, 25일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그즈음 학원에서 강의하던 그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윤한봉 소장과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후배였다. 후배는 무언가를 빼곡하게 적어놓은 대학노트를 백 대표에게 건네며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사라졌다. 열대여섯장의 대학노트에는 당시 광주의 현장일지가 깨알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걸 가지고 계엄군이 도청 진입하기 전에 도망 나온 거였다. 그 친군 그걸 나한테 전달하고 도망가다가 잡힌거 같은데 그 이후로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얼마 후 그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류돼 합동수사부에 연행됐다. 학원에서 강의 도중 수사관들에게 붙잡힐 당시 그는 후배가 건네준 광주현장일지를 소지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동향보고가 되고 있어서 일지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후배한테 배포를 부탁했지만 후배도 실패하고 다시 나한테 일지가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연행되어 집까지 압수수색을 받으러 가는 사이 일지를 품에서 꺼내 또랑에 버렸다. “아까운 사료 하나 잃은 거지” 합수부에 끌려가 그야말로 복날 개 맞듯이 맞았지만 다행히도 검찰에 근무 중이던 중학교 동기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다.
“촛불이 되어… 또 다른 촛불이 타오를 수 있도록”
40년 세월을 재야에서 활동해 온 그의 주변에는 이제 과거 길 위에서 함께 했던 동지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이강철, 김부겸 전 의원 등 과거의 동지 대다수는 정치판에 들어가거나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에게도 정치권의 러브콜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야인으로 남아 재야를 지키고 있다.
“계급적으로 주군-가신 관계를 맺는 정치권이 생리적으로 안 맞는 것 같다. 이곳은 모두가 동등하지 않나. 상임대표나 간사나 차이가 없다”
재야에서 40년 세월, 이제 백 대표는 스스로 촛불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통일연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경본부, 대경진보연대 상임대표 등을 맡으며 민족의 통일에 주된 관심을 가지며 활동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후배들이 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것이 스스로에게 남겨진 역할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촛불이 되어서 나를 내려놓고 타주면서 어둠을 밝히고, 또 다른 촛불들이 타오를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언덕이 되어서 대구에 있는 후배들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정치력을 가지고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야 한다는 고민을 많이 한다”
이상원, 천용길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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