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집 앞서 57일간 3천배… 박문진 지도위원을 만나다
2012년 12월 19일 밤 10시 40분 서울 삼성동의 한 저택에서 붉은 머플러를 목에 두른 여성이 검정색 대문을 나섰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미 집 앞 거리는 태극기를 든 채 그녀의 이름을 연호하는 지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항상 검정색 고급 세단을 타고 대문을 나섰다는 그녀지만 이날 만큼은 자신의 두 발로 대문을 나서 환호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거나 악수를 하고, 손뼉을 마주쳤다. 그렇게 100여 미터를 걸어간 그녀는 준비된 차량에 올라 여의도로 향했다.
같은 시각, 일군의 사람들이 TV를 통해 그녀가 검정색 대문 밖으로 두 발을 내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보다 하루 앞선 18일까지 이들의 동지이자, 동료이고, 친구인 한 여성노동자는 그녀가 두 발 딛고 선 그곳에서 매일같이 3천배를 했다. 10월 23일부터 12월 18일까지 57일 동안 절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여성노동자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매일 같이 새까맣게 선탠한 검정색 차량에 몸을 맡긴 채 그곳을 지나쳤다.
“나는 9시부터 TV를 아예 안봤어요. 그래서 그 장면을 지금까지도 못 봤는데, 간부들은 정말 밤새도록 엉엉 울었다고 하더라구요. 18일까지 거기서 3천배를 했는데 그 여자가 한번도 안나왔잖아요. 매번 차타고 들어가고 나오고 했잖아요. 그런데 당선 확정되고 나서 그쪽으로 걸어서, 우리가 절한 그곳으로 걸어나왔잖아요. 그걸 보고 간부들이 완전 울고, 불고 뒤집어졌다고 하더라구요”
“주변 걱정보다 노동자들의 소식이 더 충격”
쉼 없이 흐르는 눈물… “한진 동지들 만나고 마음 추슬러”
지난 7일 몇 개월 만에 일주일 휴가를 얻었다는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사진)을 만났다. 박 지도위원은 “나에 대한 주변의 걱정보다 이후 벌어진 노동자의 안타까운 소식이 더 충격이었다”며 “3천배를 올리며 정말 원 없이 노동자들, 길거리 투쟁, 장기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최강서 동지와 현대중공업 동지가 그런걸 보면서 부처님이 정말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
박 지도위원은 2006년 영남대의료원의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2007년 의료원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후 햇수로만 7년째 복직 싸움을 해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23일부터는 박근혜 당선인의 자택 앞에서 영남대의료원 해고자 문제를 비롯해 쌍용차 문제해결 등을 요구하며 매일같이 3천배를 했다.
박 당선인은 1980년부터 영남대의료원이 소속된 영남학원재단의 이사장 및 이사로 재직했다. 1988년 측근비리 등을 이유로 영남학원을 떠난 당선인은 2009년 재단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4명의 이사를 추천했고 실질적으로 재단에 복귀했다는 평을 들어왔다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3천배를 매일같이 하면서 박 지도위원은 쉼 없이 기도를 올렸다. 기도는 언제나 철탑에 오르고,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우선됐다. 그렇게 절박하게 기도를 했지만 대선이 끝난 후 노동자들의 죽음은 멈추지 않았다. 절망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박 지도위원은 추스를 수 없는 마음을 안고 강원도 평창 상원사를 찾았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부처에 대한 원망과 절망을 알고 지내던 스님에게 털어놓았다.
“절 값을 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선거야 그럴 수 있지만 그렇게 원 없이 노동자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어떻게 부처가 날 엿 먹일 수 있느냐. 나를 갖고 희롱하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을 하니까. 스님이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고, 바뀔 수 있으면 누구나 다 절을 하고 기도를 하지 않겠느냐. 그런게 아니지 않느냐’고 하더라구요” 그날 새벽, 박 지도위원은 쉼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새벽 예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길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고,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부산에서 한진 동지들을 보고, 김진숙 지도위원도 만나고 나니까, 감정을 못 추스르고 있는게 너무 사치인 것 같았어요. 한진중공업을 다녀와서 마음이 추슬러지면서 이러지 말아야겠다 싶었죠”
순정만화를 좋아하던 소녀, 나이팅게일을 만나다
지금은 쉰을 넘긴 나이에도 50일 넘게 3천배를 하며 싸우는 강인한 노동운동가이지만 애초 박 지도위원은 아프리카 의료봉사활동을 꿈꾸며 간호사가 되었다. 경기도 양평이 고향인 그가 대구에 내려온 것도 순전히 대학병원에서 2년간 간호사 수련을 받기 위해서였다. 2년만 수련받고 미련 없이 아프리카로 떠날 생각이었던 그는 “노조에 발목이 잡혀” ‘2년만’ 하던 시간을 25년째 유예하게 됐다. 여전히 그는 영남대의료원 노조가 정상화되고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되면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 지도위원은 박근혜 당선인이 측근비리와 학원 민주화 열망에 밀려 영남학원을 떠나던 그 해에 대구로 내려왔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두 여성의 삶이 마주치게 되는 순간이었다. 독재자의 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퍼스트레이디로 살아간 여성과 한약방을 하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 노동운동의 한 축을 맡게 되는 또 다른 여성. 이 둘의 삶에서 공통분모라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점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척점을 달린다.
박 지도위원은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던 해에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둘, 첫 번째 손녀를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사랑했다. 할아버지는 시장 나들이를 갈 때마다 삿갓과 새하얀 도포를 갖춰 입고 어린 손녀딸의 손을 잡은 채 집을 나섰다. 슈퍼에 손자, 손녀에게 줄 과자를 사러 갈 때도 손녀딸과 함께했다.
그 시절 박 지도위원의 유일한 낙은 용돈을 모아서 만화방에 가는 것이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작가 엄희자 씨의 순정만화를 좋아했다. 만화책 한 권을 빌려서 만화방 주인 눈치를 살피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오랫동안 어두운 만화방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면 매번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가까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조금 전까지 읽었던 만화책을 곱씹곤 했다.
“지금도 노조 활동을 하며 힘들 때 그 시절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요. 활력소죠. 정말 즐거웠던 시절이었어요. 조합원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만화책이 나쁜게 아니라고 조언해주기도 해요. 자연스럽게 책으로 연결만 시켜주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죠”
만화책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다른 책으로 옮겨갔고, 중학생이 되면서 박 지도위원은 고전과 위인전기를 탐독했다. 이즈음 읽었던 나이팅게일 전기는 그가 간호사의 꿈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다니게 된 교회를 통해 예수의 삶을 접한 그는 간호사가 예수처럼 헌신하고 봉사하며 사는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죽음에 눈물 흘린 평범한 학생, 노동운동가가 되다
박 지도위원이 고전과 위인전기을 읽으며 간호사의 꿈을 키울 무렵 박근혜 당선인은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 지도위원은 좋은 품성을 가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 지도위원도 여느 사람들처럼 박정희의 죽음을 슬퍼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 주민들이 슬퍼했던 것과 같아요.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울지 않았나 싶어요”
다음 해 박 당선인이 스물아홉 어린 나이에 신군부의 비호로 영남학원의 이사장이 될 때, 박 지도위원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 도움이 되기 위해 돈벌이에 나섰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육남매를 건사하고 있을 때였다. “큰 딸이기도 해서 내 욕심을 부리기가 힘들었어요. 한 3년 정도 돈을 벌었죠”
3년 뒤 그는 인천에 있는 간호대학에 입학했다. 거의 매일 대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있던 시절이었다. 박 지도위원 또한 매일같이 꽉 차 있는 수업 일정표와 현장실습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호기심이 컸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공부도 하고 시위에도 참여했다.
격동의 5공화국을 건너온 그는 1988년 절친한 수녀와 친구가 있던 대구행을 결정했다. 2년‘만’ 하기로 한 대학병원 생활을 계속하게 된 계기는 수간호사들의 횡포 때문이었다. 하룻강아지 신참 간호사는 수간호사의 횡포에 저항하는 싸움에 앞장서다가 덜컥 노조위원장이 됐다. 1990년은 기약했던 2년의 시간이 지나고 박 지도위원이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는 해로 기록됐다. 이후 그는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 위원장,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지내며 1996, 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의 중심에 서게 된다.
97년, IMF 상륙… 박문진과 박근혜의 선택
1996, 97년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였다. 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새누리당 전신)은 개악된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그날 아침 민주노총 지도부는 전체 단위노조에 총파업 지침을 내리고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병원노련 위원장이자 민주노총 부위원장이었던 박 지도위원도 명동성당 생활을 시작했다.
가톨릭이 전폭적으로 노동운동을 지원해주던 시기였다. 명동성당에는 ‘우리는 대통령이 싫어요’라는 현수막이 달렸고, 매일같이 이들을 지지하는 방문자들과 외신취재기자, 지지 물품이 들어왔다.
“그땐 정말 분위기가 좋았어요. 거의 매일 점심때고 저녁때고 가릴 것 없이 지지 방문하는 사람, 지지 물품이 길게 줄 서서 명동성당으로 들어왔어요. 외신기자들도 엄청나게 와서 죽치고 있으면서 취재를 했어요.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을 이렇게 폭발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흥미를 가지고 있었죠. 그땐 진짜 감동적이었어요”
이어 다음 해인 97년 12월 3일 YS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IMF의 대한민국 상륙은 박근혜 당선인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됐다. 박 당선인은 지난해 토크예능프로에 출연해 1998년 보궐선거에 출마한 이유를 IMF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프로그램에서 “IMF때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데 흔들려선 안된다고 생각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정치입문을 결심했다”며 단호하게 “IMF가 아니었다면 정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예견된 일이긴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한국 상륙은 또 한번 이 둘의 삶을 갈라냈다.
이후 박근혜 당선인은 보수 정당의 5선 국회의원으로, 당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원하는 ‘공주님’이 되었고, 박문진 지도위원은 노동운동을 계속하다가 2002년 병원으로 돌아갔고, 2006년 영남대의료원 파업 투쟁 끝에 해고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다.
“조직이 원상복구 되면 언제든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어”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시대를 맞는 박 지도위원의 가장 큰 바람은 당연히 영남대의료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2006년 파업 이후 무너진 노조가 복원되면 언제든 아프리카로 떠나는 꿈을 실현하고 싶다.
“올해 상반기에는 임단투를 진행 중이고, 조직 원상 복구 시키는건 여전히 가지고 있는 목표이기 때문에 상시적으로 집중할거에요. 하반기에는 진짜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데 가능할지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먹는게 있으면 싸기도(?) 해야 한다”는 박 지도위원은 활동가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활동을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시간을 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활동가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만큼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전 그래요. 오늘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결정을 못 내릴 때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선택하기가 쉬워지죠. 활동가들이 지금의 공간에서 일탈해서 하고 싶었던 어떤 것들을 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걸 하고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만큼 더 풍부해져서 돌아오게 되겠죠”
인터뷰 마지막 질문으로 대통령 박근혜에게 혹시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박 지도위원은 질문을 듣자마자 단호하게 “없다”고 답했다. 그는 “MBC에서도 대선 끝나고 그 주제로 인터뷰를 좀 하자고 하던데 ‘저는 안하겠습니다’ 그랬어요. 사실 개인적으로 투쟁사업장에서 인수위에 뭔가를 요청하는 것도 안했으면 하는 생각이에요. 언제나 그렇게 우리를 속여왔는데 기대할게 없잖아요. 솔직히 걔들은 걔들대로 하고, 우리는 그들이 기어나올 수밖에 없는 투쟁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며 지난 4일 쌍용차 평택공장을 방문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켜본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한구가 평택에 왔을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철탑을 쳐다도 보지 않고 갔어요. 물론 천막에 와서 15분 정도 간부들과 이야기는 하고 갔지만 철탑은 쳐다도 보지 않더라구요. 정말 염장을 있는 대로 지르고 갔어요. 사람이잖아요. 사람이면 적어도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는 해주고 가야잖아요. 그런데 쳐다도 안봤어”
지난해 10월 3천배를 하는 박 지도위원을 만나기 위해 서울 삼성동 박 당선자의 집 앞을 찾았을 때도 그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박 당선인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대통합 행보의 일환으로 전태일 동상을 찾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당시 그녀의 집 앞에서 3천배를 하고 있는 박 지도위원은 일별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 (새 정권에) 안 바라고 싶어”라고 말하는 박 지도위원의 목소리에는 그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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